태국, 라오스, 베트남

라오스 여행 (1) 위앙짠(비엔티안)의 초등학교, 대통령궁, 호 파께우

모산재 2010. 2. 10. 16:03

 

2010. 01. 12(화) 저녁

 

우여곡절에도 네 시간을 기다린 끝에 탄 우돈타니행 비행기는 수안나품 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돈무앙으로 가는 해프닝을 겪지 않았더라면 태국 내의 우돈타니를 경유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위앙짠(비엔티안)으로 바로 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선생님은 몹시 미안해하였지만 실수도 여행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는 것이 더 미안해진다.   

 

1시간쯤 걸려서 비행기는 태국 국경에 가까운 도시인 우돈타니에 도착했고, 기다리던 봉고차에 픽업되어 어둠 속 라오스 국경을 향해 달렸다. 널찍한 길은 고속도로로 평탄하게 이어졌다. 위앙짠에서 온 차는 왼쪽에 핸들이 있는 한국산 차인데(라오스는 우리와 같다.) 왼쪽 차선으로 달리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낮이었다면 풍경을 보는 재미가 좀더 있었을까...

 

 

국경 도시 농카이를 지나고 출입국 수속 절차를 밟느라 잠시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쐬기도 하였다. 인구 3만 정도의 작은 도시 농카이는 메콩 강변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이면서 방콕에서 출발하는 철도 종착지이며 방콕과 비엔티안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메콩강을 가로지르는 '우정의 다리'를 건너 라오스 땅으로 들어서면서 길은 좁아지고 차는 오른쪽 차선으로 바꾸어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9시 30분 경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비엔티안)에 도착하여 숙소 수파폰 게스트하우스에 배낭을 풀 수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겸 식당인 독참파('독참파'는 라오스 국화인 플루메리아의 라오식 이름이다)를 찾는다. 이곳은 최, 신선생님이 투자한 곳이기도 해서 사장(김사장)을 찾아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3명의 라오 처녀 종업원들이 곁에서 정성스레 구워주는 삼겹살로 주린 배를 채운다. 김사장이 접대한다면서 민가에서 담았다는 라오 소주와 함께  잘게 썬 고기 볶음을 안주로 내놓아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우리가 술잔을 나누는 사이 김사장은 옆테이블에서 종업원 중 키가 작고 눈이 초롱한 한 처자를 붙들고 스킨십을 하고 있어 민망하고 언짢았는데, 조금 뒤에 김사장이 이곳에 와서 살던 이야기를 하다가 그 처자가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한다. 오해는 풀렸지만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 격... 진정 '자라'를 본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람도 쐴 겸해서 잠시 메콩 강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어둠 속이지만 길거리의 불빛 속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넓은 메콩강 백사장은 마구 파헤쳐진 모습이다. 이곳에도 개발의 망령이 나타난 것인지...

 

강둑에 앉아서 술잔을 나누던 두 남자가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들은 흥아건설 노동자로 바로 비엔티안 일대 12km에 걸친 메콩강 둔치 공사를 맡아서 왔다고 한다. 이들이 벌인 공사로 메콩강은 파헤쳐진 것인데, 어쨌든 이들은 대단히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한 달 전에 이곳으로 왔다는 이들은 이곳에 자리잡고 사는 한국인들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믿을 사람 없으니 절대 믿지 마라." "신용불량자 아니면 사기꾼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이곳에서도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 먹는다."는 것이다. 불과 한 달만에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정도로 이곳 한국인들의 처신이 문제적인지... 안타까운 일이다.

 

 

 

2010. 01. 13(수) 오전

 

라오인들은 원래 중국 윈난성 지방에 거주했던 타이족의 일파라고 하는데 7세기 <난 짜오> 왕국을 건설 점차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며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가다가 1253년 몽골 쿠빌라이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라오스 지역에는 여러 개의 소국들이 세워졌다가 14세기 초 라오스 최초의 통일 왕국인 <란쌍 왕국>이 건립되었다.

 

라오스는 '백만 코끼리의 나라'라는 뜻의 <란쌍> 왕국 옛 이름에 빗대어 한때 '백만 년 뒤진 신비의 나라'로 불리기도 했었지만, 최근 뉴욕타임즈에서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1위로 선정되기도 하며 배낭 여행지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시절,  Laos(라오)라고 표기했던 이름이 영어식으로부터 발음되며 라오스로 불려지고,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Vientiane은 비엔티안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라오 사람들은 위앙짠이라고 부른다. '위앙'이란 라오스어로 '도시'를 뜻하고 '짠'은 향기가 강한 나무의 한 종류인 '백단향'을 일컬으니. 위앙짠은 곧 '백단향의 도시'인 것이다. 여기서 '백단향'은 아마도 라오스 국화인 '참파', 즉 플루메리아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위앙짠은 물론 라오스에는 플루메리아가 지천으로 피고 그 향기로 넘실거린다. 한편 '짠'은 '달'을 의미하기도 하여 '달의 도시'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샌드위치와 달걀 프라이, 소시지, 용과 , 귤, 오렌지 주스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위앙짠의 역사 유적 구경에 나선다. 오늘 일정은 왓 파께우-시사켓-빠투싸이(독립기념문)-탓 투앙 등으로 탓 루앙을 빼고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이라 걸어서 다니기로 한다. 지도를 보니 위앙짠은 9구로 나뉘는데 숙소에서부터 오늘 우리가 돌아다닐 곳은 위앙짠의 중심지인 제1구인 짠따부리 마을이다.

 

숙소 옆 거리에는 붉은색 바탕 중앙에 청색줄 하얀 원이 그려진 라오스 국기, 낫과 망치를 그린 인민혁명당기들이 펄럭이고 있어 사회주의 국가임을 실감한다. 사회주의 국가이다보니 유일한 합법 정당인 인민혁명당이 라오스를 통치하며 야당은 없다. 

 

 

먼저 엊저녁 어둠 속에 지켜 보았던 메콩강변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출근 시간 질주하는 차량들이 뿜어대는 소음과 매연으로 가득한 강변도로를 건너서자 포크레인 기계음이 메콩강을 어지럽히고 있다. 아름다운 천연 백사장 풍경이 있던 자리에 삭막한 한강 둔치 풍경이 대신하게 될까...?

 

 

 

이곳 사람들은 메콩강을 '남 콩(Nam Khong)'이라 부른다. '남'은 '강'이나 '물'을 뜻하니 그냥 '콩강'이 된다. 콩강 건너편은 태국이다. 위앙짠 상류에서부터 라오스 남부지방에 이를 때까지 메콩강은 태국과 라오스를 가르는 국경선이 되어 흘러내린다. 

 

앙짠은 인구 60여만인 라오스 최대 도시이지만 아직 철도가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태국 농카이에서 철도가 이어질 계획이라고 하지만 물자 수송이 주로 도로나 메콩강 수상 교통에 의존하는 편이라 경제 발전에는 지장이 많다.  

 

 

 

발길을 돌려 파께우 사원으로 향하다 미싸이 사원을 가로지르게 되었는데, 뜻밖에 사원 안에서 학생들이 수업중인 초등학교를 만난다. 나뭇가지에는 학습도구들을 담아 놓은 바구니가 매달려 있어 눈길을 끈다.

 

 

 

자본주의의 세례가 비교적 없던 어린 시절 우리들이 공부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열중하여 낯선 이들이 들여다 보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면 얼마나 신날까.

 

 

 

 

교실 앞에 아장아장 걷고 있는 꼬마의 표정도 담아 보았다. 

 

"싸바이디!"(안녕) 

  

 

 

서툰 인삿말이 낯선지 아이는 뒷걸음질치다가 엄마를 찾아 돌아서고, 나타난 엄마 곁에 서서 이방인을 바라본다. 엄마는 사진을 찍자고 포즈를 잡아 주지만 꼬마는 그럴 맘이 없나 보다.

 

 

 

"응암 라이!"(아주 이쁘다)

 

라고 말해도 소용 없다. 아이는 눈길을 다른 데로만 돌리며 딴전이다.

 

(참고로, 라오스어는 베트남어처럼 6성을 가지고 있는데 50% 이상의 언어가 같을 정도로 태국어와 유사하다고 한다. '싸바이디'라는 인삿말도 '싸왓디캅'이라고 하는 태국어와 닮았다.)

 

 

 

메콩강으로부터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리는 주도로와 거리는 우리 나라의 소도시 정도의 규모로 아담하다. 툭툭이와 열대식물, 라오문자가 있어 이국 풍경임을 느끼게 할 뿐 거리는 잘 정돈되어 있다.

 

 

숙소에서 1km가 채 되지 않은 곳에 대통령궁이 자리잡고 있다.

 

정문이 아닌 서쪽으로 난 작은 문에 위병 한 사람이 서 있지만 태평하기 짝이 없고, 문 안으로 들어서서 사진을 찍는데도 물끄러미 쳐다 볼 뿐이다. 대통령 관저에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위엄이 없어도 되는 나라, 그것이 라오스다.

 

 

  

위앙짠은 란쌍 왕국의 수도인 루앙프라방에서 1563년 비엔티안으로 왕궁을 옮겨온 이래 라오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베트남 캄보디아를 차례로 점령한 프랑스는 3국으로 분리된 라오스를 통합시키고 총독이 주재하는 위앙짠을 행정수도로 정하고 식민지 통치를 하였다. 

 

 

 

프랑스가 소수민족을 가혹하게 다루고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자 이에 항거하여 라오스인들은 대규모 봉기를 세 차례 일으키며 저항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1958년 총선에서 라오애국전선이 승리하였으나 미국이 붕움(우익)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고, 61년 제네바 국제회의 협정 체결로 이듬해 좌파, 우파, 중도파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다.


1975년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미국이 물러가면서 라오스도 국왕이 축출되고 빠텟라오는 무혈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폐지시키고 라오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된다. 라오스 인민 혁명당이 정권을 잡은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서방과  중국 등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사회 전반에 걸쳐 개방하기 시작하여 점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 대통령궁, 호 파께우, 시사켓 사원이 있는 네거리. 멀리 북쪽으로 빠투싸이(독립기념문)가 보인다.

 

 

 

 

대통령궁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파께우 사원이다. 씨사껫(Wat Si Saket)사원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사원이다. 예전에는 라오스 왕실 사원이었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승려도 없고 예불을 올리는 의식도 사라졌다.

 

정문에는 'Phra keo'라고 표기했는데 아마도 'r'음이 프랑스식으로 발음되어 'h'와 유사한 음가를 가진 게 아닌가 싶다. 루앙프라방을 루앙파방이라 발음하는 것처럼, 에메랄드 불상 '프라 께우'를 모시고 있는 사원임을 알 수 있다.

 

 

 

호 파께우(Ho Phra keo) 사원은 1565년 왕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엔으로 옮길 때 에메랄드 불상을 모시기 위해 건축되었으나 불행하게도 1778년 태국의 시암(샴) 왕국과의 전쟁 때 건물은 불타고 에메랄드 불상을 빼앗겼는데, 이 에메랄드 불상은 현재 방콕의 왕궁사원인 왓 프라께우에 모셔져 있다.   

 

녹색 옥으로 조각한 높이 66cm의 이 에메랄드 불상은 1432년 치앙마이의 쩨디 루앙의 무너진 폐허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치앙마이 지역 란나 (Lanna) 왕국의 왕으로 추대된 라오스 왕자 가 선왕의 서거로 1565년에 라오스왕(셋타티랏)으로 복귀하면서 가져온 것이었다.

 

파께우 사원은 그 뒤 1828년 태국과 라오스 간의 전쟁 속에서 다시 한번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지금의 건축물은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재건된 것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서 사용되어 라오스 최고의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6~9세기에 만들어진 드바라바티(Dvaravati) 양식의 불상과 라오스 스타일의 좌상이나 입상의 동불상 몇 개, 라오스어나 몬(Mon)어로 새겨진 비석들이 유명하다. 또한 내부 전시실에는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각종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 파께우 사원 정면

 

 

 

 

↓ 사원 입구에 선 입불상들

 

 

 

입구 앞 열에는 손바닥을 내민 불상, 입구 양쪽 끝에는 손바닥을 펴고 땅을 가리키는 불상 등 두 종류의 청동 입불상이 있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은 "싸움을 멈추라." 즉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고, 차롓자세로 손바닥을 펴고 끝을 땅으로 가리키는 뜻은 "비를 내려 달라." 즉 풍요를 기원하는 뜻이라 한다.

 

이들 입불상들이 힌두 양식의 영향을 받은 드바라바티 양식일까 싶은데, 드바라바티는 지금의 타이 메남강 하류에 몽족이 처음 세웠던 왕국이다. 6세기말 독립왕국이 되어 11세기말까지 독립을 유지하며 일찍부터 인도와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가진 몽족의 드바라바티(Dvaravat)는나중 그들을 정복한 크메르·미얀마·타이에 인도 문화를 전달하고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뒷쪽으로 보이는 돌들은 라오스어나 몬(Mon)어로 새겨진 비석들이다.  

 

 

출입문 옆에 새겨진 천상의 무희 압사라(apsara)상 역시 힌두 사원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위대한 인드라 등 남신들이 출현할 때 동반하여 춤을 추며 위대한 신을 즐겁게 하고 유혹하는 압사라, 그런데 이 압사라는 힌두의 압사라와는 달리 요염함은 사라지고 불상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근엄하게 표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압사라를 받치고 있는 저 원숭이라는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입구에 전시된 목조 유물들

 

 

 

내부 전시실에는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각종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위의 법당 안 사진은 내부에서 사진 찍는 것을 금지하여 입구에서 당겨 찍은 모습이어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애초 이곳은 에메랄드 불상(프라 께우)이 안치되어 있던 곳이다. 태국에 불상을 빼앗긴 이후 사원의 기능은 상실되고 작은 박물관이 되어 버린 법당을 둘러 보며 절로 쓸쓸함을 느낀다.

 

 

↓ 사원의 남북 회랑과 불상들

 

 

 

 

↓ 사원 뒷문 입구의 청동 입불상들

 

 

 

 

개로 보이는 이 청동 동물상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일까.

 

 

 

 

건물 기단부의 층계는 커다란 나가상이 지키고 서 있어 힌두 사원과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 동남아 지역 사원의 특징인 듯하다.

 

 

 

 

그런데 나가상과 계단 등 기단부 전체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이다. 70여 년 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복원된 건물 전체가 몽땅 콘크리트이다. 여행 내내 보았던 라오스 사원들은 거의 콘크리트 건물이었으니,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된 그들의 건축물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라오스 건축의 원형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뒷쪽에서 바라본 사원의 모습

 

 

 

 

회랑을 한 바퀴 돌아 정면 입구로 돌아가려는데, 저 멀리 회랑 끝에서 백인 여인 한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그들 세계에서 느낄 수 없었던, 동양의 낯선 문화가 주는 신비감과 경이로움에 젖어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미개한 동양'의 문화에 대한 그들 문화의 우월감을 새삼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그 어느 쪽이든 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겠지. 부디 가슴 가득 불심을 채우고 느끼며, 일방적인 잣대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당신들의 배타주의적 세계관에 물음표를 던져 주기를...

 

 

 

다시 밖으로 나온 우리는 7,000 불상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건너편 시사켓 사원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