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이야기

연꽃(Lotus) 이야기, 하회마을 흰 연꽃을 감상하다가…

모산재 2009. 9. 4. 19:39

 

예정에도 없이 5년만에 찾게 된 하회마을은 다소 낯선 풍경을 거니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마을 가까이에까지 차를 타고 가던 예전과는 달리 한참 떨어진 곳에 상가와 함께 주차장이 생겼다. 1킬로는 더 되지 싶은 길, 유유히 휘돌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걷는 강변길은 성가시기보다는 색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겨울에 왔기에 기억에 없는 것일까. 하회마을 입구에서 만난 연꽃 습지는 낯설고도 정겨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꽃이 거의 지고 있었지만 흰 연꽃만 드문드문 피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따금씩 따가운 햇살을 파라솔로 받으며 멀리 강뚝길을 따라 걸어가는 여인들의 모습과도 어울려 풍경은 한순간 낭만으로 가득 차는 듯하다.

 

 

 

 

 

 

 

흙탕물에서 긴 꽃대를 올리고 한 송이씩 피어난 흰 연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찌든 일상을 살아가는 삶에 통쾌한 비약을 일깨워 주는 듯하여 한여름의 습도에 눅눅해진 마음조차 환하고 서늘하게 맑아지는 듯하다. 더러움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서 오히려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 은은하게 전하는 청아한 향기를 맡으며 어느덧 누추한 현실을 떠나 맑고 고고한 정신의 영토에 들어서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연꽃의 꽃말이 '청결, 신성,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던가….

 

모시 손수건처럼 정갈한 너른 연꽃 꽃잎에는 넉넉한 한 세상이 담긴 듯, 부처 아닌 이 중생도 저 꽃잎 속 무량의 세계에 포근히 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 부처와 보살만이 번잡함과 고통과 더러움에 부대끼는 사바세계를 넘어 고결 청정한 세계에 이르고자 하겠는가.

 

 

 

 

 

 

 

문득 옛 사람들은 연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에 여행을 다녀온 뒤 대학 시절 보았던 세창서관본 <고문진보집>를 뒤적거려 보았다. 누런 표지에 역시 누렇게 바랜 책장을 한참 넘겨 보아도 시들을 수록한 '전집(前集)'에는 연꽃을 다룬 글은 보이지 않는데, 마침 '후집(後集)'의 '券之十'에 이르러 주무숙(周茂叔)의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이 나온다. 무숙이 누구인가. 주희(주자)가 집대성하여 근세의 동아시아를 지배한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북송의 대학자 주돈이 아닌가.

 

수필이라기에는 너무나 짧은 '애련설'을 내 짧은 인문 지식으로 풀이를 해본다. 연꽃의 고결한 기품을 '화중군자(花中君子)'라 칭송한 그의 글은 연꽃만큼 향기롭다.

 

 

水陸草木之花可愛者甚蕃     뭍과 물의 풀꽃나무를 사랑한 사람은 많았으니
晉陶淵明獨愛菊   진나라 도연명은 홀로 국화를 사랑하였고,
自李唐來世人甚愛牡丹   이씨의 당나라 때부터는 세상 사람들이 모란꽃을 매우 사랑하였다.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   내가 홀로 연꽃을 사랑함은 진흙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濯淸漣而不夭中通外直   맑은 물결에 씻겨도 굽히지 않고 줄기 속은 비었으되 겉은 곧으며,
不蔓不枝香遠益淸   덩굴도 가지도 치지 않았으되 향기는 멀어도 더욱 맑고,
亭亭淸植可遠觀而不可褻翫焉   꼿꼿하고 맑은 기품으로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희롱할 수 없음이라.
予謂菊花之隱逸者也   내가 이르건대 국화는 은일(隱逸)을 상징하는 꽃이요, 牡丹花之富貴者也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며,
蓮花之君子者也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이다.
噫菊之愛陶後鮮有聞   아아! 국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고,
蓮之愛同予者何人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만 한 이 누구인가?
牡丹之愛宜乎衆矣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당 많으리라.

 

* 濯淸漣而不夭 :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글을 살피다 보니 '夭'를 '妖'로 기재하고 '요염하다' 또는 '요망하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문맥상 맞지 않은 듯하다. 세창서관본에는 '夭'로 적고 있는데, '굽히다' '꺾이다'의 의미로 풀이되어 '물결에 씻기다'는 구절과 자연스런 호응을 이룬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당 많으리라."면서도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 만한 이 누가 있으리?"라고 하는 그의 정신세계는 더욱 향기롭다.

 

옛 선비들은 사시절 풍광과 꽃을 좇아 시와 풍류를 즐겼는데, 다산 정약용은 당대의 선비들과 어울려 '죽란시사(竹蘭詩社)'라는 풍류 모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대문 밖에 서연지(西蓮池)라는 연못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못에 연꽃이 활짝 피어나는 여름날 이른 새벽 연꽃이 꽃잎을 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그들은 서연지로 모여들었다. 연꽃 피는 소리를 듣는다니…!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 매몰되었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던 화석식물인 연꽃은 불생불멸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밤에는 꽃잎을 오므렸다가 아침이면 꽃잎을 열며 새롭게 피어나는 모습은 재생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용궁에 갔다가 다시 바다 위로 떠오를 때 연꽃 속이었으니, 연꽃은 심청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라 할 수 있겠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신화에는 혼돈의 물 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Narayana, 비슈누신의 화신)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연꽃이 우주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임을 말한다. 극락에 왕생할 때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연화화생(蓮華化生)의 불교 사상, 심청의 부활은 이를 세속적으로 해석한 소설적 모티브일 것이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다가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가섭존자만이 미소로 답했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는 연꽃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말이다.

 

 

<대장경> 제개장보살소문경(除蓋障菩薩所問經) 9권에 '연화 십덕'(또는 '연화 십유')이라는 것이 있다. 주돈이의 '애련설'과 비견될 정도로 연꽃의 미덕을 간결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인용해 본다.

 

1. 이제염오(離諸染汚)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2. 불여악구(不與惡俱)    악함과 함께 하지 않으며
3. 계향충만(戒香充滿)    청아한 향이 충만하고
4. 본체청정(本體淸淨)    청정함을 잃지 않고
5. 면상희이(面相喜怡)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6. 유연불삽(柔軟不澁    그 맛이 부드럽고 떫지 않으며
7. 견자개길(見者皆吉)    그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길하고
8. 개부구족(開敷具足)    꽃과 열매가 함께 하니 빠짐이 없으며
9. 성숙청정(成熟淸淨)    성숙해서도 청정하고
10. 생이유상(生已有想)    그 삶은 상념에 들게 한다.

 

 

그런데, 연꽃의 미덕을 지나치게 정적으로 관념적으로 투영해서 나열한 듯한 느낌이다. 이보다 더 큰 연꽃의 미덕은 어째서 보지 못했을까? 연꽃은 지상의 풀 중에서 가장 넓은 잎사귀를 우산처럼 펼쳐 넓은 그늘을 드리워 그 품 속에 온갖 생명들이 깃들게 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연잎 잎자루 군데군데에는 붉은 색깔의 우렁이 알들이 붙어 있다. 청개구리들이 이 너른 연잎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그늘 아래에서 수많은 곤충들과 수중 생물들이 저마다의 생을 느긋하게 때로는 바쁘게 영위하고 있다. 뭇 생명들을 품어 주는 이 넉넉한 연꽃의 미덕이야말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불교 정신에 더 다가선 것이 아닐까?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있다. 향수해(香水海)라는 바다에 1,000개의 꽃잎을 가진 거대한 연꽃이 있어 꽃잎 하나하나가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진리와 빛의 법신불 비로자나여래는 그 연꽃 위에 앉아 스스로 몸을 변화시켜서 1,000명의 석가모니불이 되어 각각의 꽃잎에 몸을 나타내고, 다시 그 1,000의 석가는 100억의 보살이 되어 보리수 아래에서 설법하고 있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바다를 지키고 한없는 행(行)의 꽃을 나타내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다 간직하며 염정(染淨)이 서로 걸림 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의 불국토가 바로 연화장 세계이다.

 

 

 

 

▲ 우렁이 알을 달고 있는 연꽃 잎자루

 

 

 

 

● 연꽃 Nelumbo nucifera | Indian lotus   ↘   수련목 연과 연속 다년생 수초

뿌리가 옆으로 길게 뻗으며 원주형이고 마디가 많으며 가을철에 끝부분이 특히 굵어진다. 잎은 근경에서 나오고 엽병이 길며, 물 위에 높이 솟고 둥근 방패모양이며 백록색이고 잎맥이 사방으로 퍼지며 지름 40cm정도로서 물에 잘 젖지 않고 엽병은 원주형이며 짧고 뾰족한 가시가 산생한다. 꽃잎과 더불어 수면보다 위에서 전개한다.

꽃은 7~8월에 피고 지름 15-20cm로서 연한 홍색 또는 백색이다. 뿌리에서 꽃대가 나오고 화경은 엽병처럼 가시가 있으며 화경 끝에 대형의 꽃이 1송이 핀다. 꽃받침은 4~5조각인데 녹색이고 소형이며 일찍 떨어지고 꽃잎은 여러개이며 길이 8-12cm, 폭 3-7mm로서 거꿀달걀모양이고 둔두이며, 꽃턱은 크고 해면질이며 길이와 지름이 각 10cm정도로서 표면이 평탄하고 역원뿔모양이다. 열매는 수과로서 타원형이고 길이 20mm정도이며 검게 익고 먹을 수 있다. 과실을 연실(蓮實)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