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이 지나면서 피부로 느껴질 만큼 해가 짧아지고 있다.
찾아본 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묏등 언덕 풀꽃들 소식이 궁금하여
퇴근하자마자 한 발쯤 남은 해를 바라보며 대모산 언덕으로 향한다.
개암나무 가득한 숲을 지나며 알알이 잘 익었을 개암 열매들을 찾아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매달린 열매들은 대부분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말라 비틀어진 모습이다.
근 10여 년 사이에 큰키나무들이 쑥쑥 자라 숲그늘이 압도하면서
햇볕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열매가 성숙하지 못한 탓인가 싶다.
열매야 달든 못 달든 생명의 본능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
겨울을 나게 될 수꽃 이삭이 벌써 주렁주렁 달렸다.
아직 해가 진 것도 아닌데 밤처럼 캄캄한 응달 숲에서
가냘픈 이고들빼기 한 그루 환하게 꽃을 피웠다.
작년에 보았던 과남풀(칼잎용담)을 볼 수 있을까 들어선 길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얽히고 설킨 덤불에 걸려 진행하기도 힘들다.
과남풀은 찾지 못하여 열쩍었던 카메라는
'꿩 대신 닭'격으로 버섯 하나 담고 희희낙락이다.
바람이 일렁인다 싶었는데 알밤 후두둑 툭 툭 떨어지지 않는가.
생각지도 않게 이 숲 속에서 고소한 개암 열매 바수지 못한 한을 싸락밤 줍는 재미로 푼다.
양쪽 호주머니 불룩하게 알밤을 채우고 보니
아뿔사, 해가 산 등성이를 넘어서려 하고 있지 않느냐.
맞은 편 묏등 언덕은 보다 높은 지대이니 바쁘게 재촉하면 한 시간은 못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고마리 우거진 풀섶에 긴산꼬리풀이 때늦은 꽃을 피웠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닭의덩굴 열매들을 담아본다.
벌초 뒤 여기저기 자라난 제비꿀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제대로 자라진 못한 땅꼬마 참새피도 바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다시 자라난 으아리는 달랑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안도하는 모습이다.
예초기를 맞은 장구채는 더 많은 가지를 내어 많은 꽃들을 피웠다.
쥐꼬리처럼 생긴 쥐꼬리새풀이 메마른 언덕 여기저기에 피어 있다.
아른아른 희미한 빛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는다.
요 녀석은 뭘로 봐야 할까.
어찌 보면 드렁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새인가 싶기도 하고...
아마도 꽃봉오리를 맺을 무렵 벌초 예초기에 줄기가 댕강 잘려나갔을 이 녀석은 뿌리잎만 남았다.
이 녀석이 누구냐고? 단박에 알아 본다면 당신은 제법 고수...
그 답은 다음에 나온다.
단정히 벌초를 한 묏등 언덕,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풀꽃들이 한창 생기를 띠어야 할 계절에
눈 앞에 펼쳐진 풀밭은 이렇게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다.
예초기 칼날의 아픔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기력을 다하여 다시 생명의 불꽃을 피워 올릴 준비를 하던
이 볕 좋은 묏등 언덕의 풀들은 또다시 독하디 독한 제초제 세례를 맞고 말았다.
앞에서 보았던 뿌리잎의 주인공은 바로 이 녀석!
제초제를 비교적 덜 맞은 풀섶에 자란 이 층층잔대는
보랏빛이 아주 탈색해 버린 아주 특이한 모양의 흰 꽃을 피웠다.
암술도 지나치다 싶게 비대한 모습이고 화관의 끝도 벌어진 모습이어서
늘 보던 층층잔대와는 다른 낯선 모습이다.
제대로 꽃을 달지 못한 이런 모습의 잔대를 주변에서 몇 그루 더 발견하고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니 고개만 갸웃거린다.
그리고 이 언덕 이 계절이면 어김없이 꽃봉오리를 가득 피워 올리던 몇 그루 과남풀,
있던 자리 찾아 몇 바퀴나 돌며 아무리 더듬어도 보이지 않는다, 끝내...
요 몇 년 사이에 지독히도 뿌려대던 제초제의 등쌀에 결국은 단종이 되어 버린 것인지...
그렇게 맴맴 과남풀 찾아헤매다 엉뚱하게도
예전에 본 적이 없었던 고사리삼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이 외에도 주변에 드문드문 고사리삼들이 포자잎을 올리고 있어
한 녀석 한 녀석 정성들여 기념 사진을 찍어 둔다.
빛이 좋지 않아 초점이 잘 잡히지 않으니 속 상해 하면서...
그리고 어둠 밀려오는 언덕 위에서 만나는 미역취 환한 꽃,
그렇게 지천이었던 꽃이 겨우 몇 개체만 보일 뿐이다.
그 옆에선 솜나물 폐쇄화 봉오리도 봉긋 솟아 올랐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모습으로만 보았던 이 녀석은 연리초,
내년엔 꽃으로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을는지...
뭇생명들의 요람이자 동시에 내 풀꽃나무 여행의 요람이기도 한 이 묏등 언덕,
죽은자들을 위한 인간의 간섭으로 생명의 환희로 가득했던 이 풀밭 언덕은
이제 제초제 세례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언덕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인지...
어둠에 잠긴 산길을 되내려오는 발길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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