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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나무 일기

제초제에 신음하는 묏등 언덕의 가을 풀꽃들

by 모산재 2008. 12. 8.

 

추분이 지나면서 피부로 느껴질 만큼 해가 짧아지고 있다.

 

찾아본 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묏등 언덕 풀꽃들 소식이 궁금하여

퇴근하자마자 한 발쯤 남은 해를 바라보며 대모산 언덕으로 향한다.

 

 

개암나무 가득한 숲을 지나며 알알이 잘 익었을 개암 열매들을 찾아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매달린 열매들은 대부분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말라 비틀어진 모습이다.

 

근 10여 년 사이에 큰키나무들이 쑥쑥 자라 숲그늘이 압도하면서

햇볕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열매가 성숙하지 못한 탓인가 싶다.

 

열매야 달든 못 달든 생명의 본능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 

겨울을 나게 될 수꽃 이삭이 벌써 주렁주렁 달렸다.

 

 

 

아직 해가 진 것도 아닌데 밤처럼  캄캄한 응달 숲에서

가냘픈 이고들빼기 한 그루 환하게 꽃을 피웠다.

 

 

 

작년에 보았던 과남풀(칼잎용담)을 볼 수 있을까 들어선 길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얽히고 설킨 덤불에 걸려 진행하기도 힘들다.

 

과남풀은 찾지 못하여 열쩍었던 카메라는

'꿩 대신 닭'격으로 버섯 하나 담고 희희낙락이다.

 

 

 

바람이 일렁인다 싶었는데 알밤 후두둑 툭 툭 떨어지지 않는가.  

생각지도 않게 이 숲 속에서 고소한 개암 열매 바수지 못한 한을 싸락밤 줍는 재미로 푼다.

 

양쪽 호주머니 불룩하게 알밤을 채우고 보니 

아뿔사, 해가 산 등성이를 넘어서려 하고 있지 않느냐.

 

맞은 편 묏등 언덕은 보다 높은 지대이니 바쁘게 재촉하면 한 시간은 못되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고마리 우거진 풀섶에 긴산꼬리풀이 때늦은 꽃을 피웠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닭의덩굴 열매들을 담아본다.

 

 

 

벌초 뒤 여기저기 자라난 제비꿀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제대로 자라진 못한 땅꼬마 참새피도 바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다시 자라난 으아리는 달랑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안도하는 모습이다.

 

 

 

예초기를 맞은 장구채는 더 많은 가지를 내어 많은 꽃들을 피웠다.

 

 

 

쥐꼬리처럼 생긴 쥐꼬리새풀이 메마른 언덕 여기저기에 피어 있다.

아른아른 희미한 빛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는다.

 

 

 

 

요 녀석은 뭘로 봐야 할까.

어찌 보면 드렁새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새인가 싶기도 하고...

 

 

 

아마도 꽃봉오리를 맺을 무렵 벌초 예초기에 줄기가 댕강 잘려나갔을 이 녀석은 뿌리잎만 남았다.

 

이 녀석이 누구냐고? 단박에 알아 본다면 당신은 제법 고수...

 

 

 

그 답은 다음에 나온다.

 

 

단정히 벌초를 한 묏등 언덕,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풀꽃들이 한창 생기를 띠어야 할 계절에

눈 앞에 펼쳐진 풀밭은 이렇게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다.

 

예초기 칼날의 아픔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기력을 다하여 다시 생명의 불꽃을 피워 올릴 준비를 하던  

이 볕 좋은 묏등 언덕의 풀들은 또다시 독하디 독한 제초제 세례를 맞고 말았다.

 

 

 

앞에서 보았던 뿌리잎의 주인공은 바로 이 녀석!

 

 

 

제초제를 비교적 덜 맞은 풀섶에 자란 이 층층잔대는

보랏빛이 아주 탈색해 버린 아주 특이한 모양의 흰 꽃을 피웠다.

 

암술도 지나치다 싶게 비대한 모습이고 화관의 끝도 벌어진 모습이어서

늘 보던 층층잔대와는 다른 낯선 모습이다.

 

 

 

제대로 꽃을 달지 못한 이런 모습의 잔대를 주변에서 몇 그루 더 발견하고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니 고개만 갸웃거린다.

 

 

그리고 이 언덕 이 계절이면 어김없이 꽃봉오리를 가득 피워 올리던 몇 그루 과남풀,

있던 자리 찾아 몇 바퀴나 돌며 아무리 더듬어도 보이지 않는다, 끝내...

 

요 몇 년 사이에 지독히도 뿌려대던 제초제의 등쌀에 결국은 단종이 되어 버린 것인지...

 

 

그렇게 맴맴 과남풀 찾아헤매다 엉뚱하게도

예전에 본 적이 없었던 고사리삼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이 외에도 주변에 드문드문 고사리삼들이 포자잎을 올리고 있어

한 녀석 한 녀석 정성들여 기념 사진을 찍어 둔다.

 

빛이 좋지 않아 초점이 잘 잡히지 않으니 속 상해 하면서...

 

 

그리고 어둠 밀려오는 언덕 위에서 만나는 미역취 환한 꽃,

그렇게 지천이었던 꽃이 겨우 몇 개체만 보일 뿐이다.

 

 

 

그 옆에선 솜나물 폐쇄화 봉오리도 봉긋 솟아 올랐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모습으로만 보았던 이 녀석은 연리초,

내년엔 꽃으로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을는지...

 

 

 

뭇생명들의 요람이자 동시에 내 풀꽃나무 여행의 요람이기도 한 이 묏등 언덕,

죽은자들을 위한 인간의 간섭으로 생명의 환희로 가득했던 이 풀밭 언덕은

이제 제초제 세례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언덕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인지...

 

어둠에 잠긴 산길을 되내려오는 발길이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