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추석, 고향의 들에서 만난 풀꽃들 (1)

모산재 2008. 11. 30. 18:35

 

추석, 고향의 들에서 만난 풀꽃들 (1)

 

 

추석 전날,  서울 창원 진주의 형제 가족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명절 때 잘 오지 않던 조카들도 할아버지 차례는 지내야 한다는 걸 알고 함께 와서 더욱 기분 좋습니다. 나이 서른을 앞둔 청년들이니 이제 아버지와 삼촌들과 함께 막걸리잔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집니다. 보름달 아래 마당의 평상에서 조카들과 잔을 건네며 이런 저런 애기를 나누게 된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계기가 된 듯합니다. 

 

추석날 아침입니다. 일어나자 마자 아버지 산소부터 다녀오기로 합니다. 들 가운데 있는 산소라 잡초들이 워낙 극성이어서 풀도 맬 겸 풀꽃 산책도 할 겸 해서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섭니다.

 

 

집 앞 개울가에 밭이 된 논가에 등잔 같은 호박꽃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미명의 시간을 밀어내려는 듯이...

 

 

 

해가 뜨지 않은 시간 달개비꽃의 저 차분한 개화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바른 이름을 '닭의장풀'이라고 정했다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지 않아 나는 여전히 달개비꽃이라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집에서부터 독뫼를 지나 가는 길은 계속 개울로 이어집니다.

 

개울을 배경으로 개기장 이삭꽃차례를 담아봅니다. 곡식인 기장에 비해서 이삭이 부실하니 이름을 '개'기장이라 붙였을 겁니다. 산골에서 흔한 토종 개기장은 이렇게 맵시가 날씬한데, 도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미국개기장은 줄기가 아주 퉁퉁한 게 미련해 보입니다.

 

 

 

잎과 잎집에 잔털이 보송보송한 참새피는 언제 보아도 귀엽습니다. 지금 한창 개화기여서 저렇게 노란 꽃밥을 잔뜩 달았습니다. 좀 있으면 신라 왕관의 장식 같은 납작한 열매들이 보기 좋게 쪼란히 달릴 것입니다.

 

 

 

총채 같은 억새꽃도 한창입니다. 이삭줄기도 붉은 갈색, 노란 단풍든 콩밭을 배경으로 꽃밥도 붉은 갈색, 가을 빛이 가득합니다.

 

 

 

이삭이 무거워서인지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 녀석은 아주 낯설기만 합니다. 도대체 뭘까... 답을 얻지 못하여 서울에 돌아와 도감을 뒤적여 보고서야 나도기름새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논둑엔 바람하늘지기가 무성합니다. 어째서 '바람'도 잘 타지 않을 이 꼬맹이 하늘지기에게 '바람'이란 접두어를 붙여 줬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땅'하늘지기라 하든지 '논둑'하늘지기라고 하면 더 어울렸을 것을...

 

 

 

어린 시절 습기 있는 들에서 많이도 보았던 벋음씀바귀를 만납니다. '벋음씀바귀'란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땐 그 정체를 몰라 헤매었던 녀석이기도 합니다. 줄기가 땅 표면으로 벋어나가며 개체번식하는 생명력 강한 풀입니다.

 

 

 

작년 꽃을 보지 못하고 열매만 만났던 긴두잎갈퀴 꽃을 드디어 만납니다. 백운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백운풀이라 불리던 것인데 특히 꽃자루가 이처럼 긴 것을 긴잎백운풀이라 하는데 정명이 긴두잎갈퀴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꽃잎이 네 개인데 다섯 개인 것이 더러 보여서 이채롭습니다.

 

 

 

고마리 가득한 계곡, 한련초 튼실한 씨방에 매달려 있는 이 나방은 또 무엇일까요...

 

 

 

멀리서 보면 꽃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잡초 고마리 꽃,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면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요? 투명에 가까운 다섯 장의 분홍 꽃잎과 점점이 하얀 꽃밥...

 

 

 

일주일만인데 산소에는 또 잡초들이 많이 자랐습니다. 새로 조성된 땅이라 작은 풀들이 자라나기 얼마나 좋은지 줄기가 빨간 어린 강아지풀들이 빼곡히 진을 치고 방동사니 비노리 붉은서나물 지칭개 쑥 들이 다투어 영역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위의 풀들 외에도 석류풀들이 꽤 많이 어우러져 좁쌀만한 흰꽃들을 피웠습니다. 요 녀석들은 잔디가 자라는데 그다지 위협적일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합니다.

 

 

 

풀을 뽑는데 두 시간 정도는 걸린 듯합니다. 

 

건너편 다리 위에 승용차들이 속속 들어서는 걸 보니 부산 삼촌들도 다 왔나 봅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기로 합니다. 중간에 개울에서 손을 씻습니다. 손톱과 손가락 끈에 든 푸른 풀물은 빠지지 않는군요.

 

 

웅덩이에서 물달개비꽃을 발견하고 그냥 갈 수야 있습니까. 

 

 

 

그리고 논둑에서 좀고추나물 꽃도 눈에 띄지 뭡니까.

 

 

 

아까 올 적엔 보이지 않았던 사마귀풀이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해가 환하게 뜨지 않으면 꽃잎을 절대 열지 않는 녀석이지요. 물론 해가 사라지면 꽃잎을 닫아 버리고...

 

 

 

꽃잎이 네 개인 특이한 사마귀풀도 보입니다.

 

 

 

벗풀인지 보풀인지 늘 헷갈리는 녀석들, 집 주변 논에 가득합니다. 철이 지났는지 꽃들은 보이지 않고 열매만 보입니다. 

 

 

 

물질경이꽃을 대면하기는 처음입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이 녀석, 어쩐지 집 주변 논에도 있을 듯하여 벼포기들을 몇 군데 비집고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잘 생긴 녀석이 환한 웃음으로 맏이합니다. 논에 물이 있었더라면 꽃 그림자까지 담을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만해도 횡재한 기분입니다.

 

 

 

집에 도착하니 큰집에선 벌써 차례가 시작되었습니다.

 

큰집에서 차례를 마치고 모두들 우리 집으로 이동합니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동안 어머니와 젊은 며느리들이 정성을 다해서 가득 차린 아버지의 차롓상은 낯설기만 합니다.

 

명절이라고 해야 남은 풍속은 이제 차례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래도 십여 년 전까지는 윷놀이라도 하였는데 차례를 마친 사람들은 성묘하러 떠나거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후가 되면 승용차들로 가득 찼던 시골집들은 다시 휑하니 비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