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여행 9> 석포 - 내수전의 해안 산길 트래킹
2007. 07. 25
나리분지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석포 마을에서 내린다. 어제와는 달리 버스비도 6,000원이니 반값이다.
기사 아저씨는 안면이 익었다고 등산로로 접어드는 곳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다. 길이 몇 갈래로 갈라지고 또 공사중인 곳이어서 그런 친절이 없었다면 혼란을 겪었을 듯싶다.
석포마을은 개척 당시 주민들이 정착하여 여러 해 살면서 정이 들어 외지로 이주할 때 울고 갈 정도라 하여 정들포, 또는 정들깨라 불렀다고 하는데, 뒤에 마을 이름을 지으면서 돌이 많아 석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냥 정들깨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면 참 좋았을 것을...
오늘 걷게 되는 석포-저동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은 울릉도 여행의 백미라고 해도 좋을 듯한 코스이다. 울릉도의 동쪽 해안의 절경을 감상하며 잘 보존된 원시림 숲속 오솔길을 걷는 즐거움을 어디서 또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다행스럽게 4.4km 길이의 이 구간은 울릉도 일주도로 48.4km에서 제외되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간직된 트레킹 코스로 남게 되었다. 이곳 주민들이 울릉읍에 가기 위해서는 울릉도 섬을 거의 한 바퀴 돌아가거나, 산길을 걸어서 저동까지 가야 한다.
처음에는 이곳을 일주도로로 연결하려던 것을 환경단체의 반대로 유보 상태로 있는 곳. 그런데, 이 글을 올리는 오늘 또 공사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워낙 절벽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해안으로 길을 낸다는 것도 트레킹로를 따라서 길을 낸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길을 낸다면 엄청난 자연 훼손을 피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길을 따라 걷다 쥐똥나무를 만난다. 아마도 섬쥐똥나무이지 싶어서 일단 담아 보았지만, 그냥 쥐똥나무와는 어떻게 다른지 딱히 집어내기 어렵다. 쥐똥나무에 비해 잎이 크고 두껍고, 꽃차례에 잎 같은 포가 달려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잠시 도로(아마도 죽암마을로 내려가는)를 따라 걷다가 등산로로 접어든다. 가파른 동쪽 해안으로 난 길이니, 햇빛은 절로 가려져 이 뜨거운 여름날 걷기에도 아주 딱이다.
걷는 길 숲 사이로 이곳에서 그냥 취나물로 부르는 울릉미역취 밭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중간에 만난 작은 골짜기
긴사상자는 벌써 긴 열매를 맺고 잎과 줄기는 말라버린 모습이다.
울릉도에 흔하게 자라는 선갈퀴도 가시털을 가득 단 열매를 맺었다.
애기쐐기풀은 이제 긴 꽃차례에 꽃을 피우고 있다.
뜻밖에 산길 옆에서 때늦은 울릉도산 제비꽃 한 송이를 만난다.
줄기가 있고 꽃색이 짙은 보라인 것이 아마도 큰졸방제비꽃이 아닌가 싶은데, 같은 울릉도 특산 제비꽃인 섬제비꽃과도 비슷한 모양이어서 어느 쪽인지 판단이 어렵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아래 어디쯤 와달리가 있고 거기에 용굴이 있을 터인데, 길이 300m, 폭 50m 정도의 천연동굴인데 다시 수직 동굴이 있어 바닷물과 통한다고 한다. 30여 년 전에 발견되었다 한다.
와달리는 개척 초기에 한학자 황융영이란 사람이 혼자 이곳에 은거하며 누워서도 뜻은 통달한다는 와달(臥達)이라고 했던 데서 유래했다 한다.
섬단풍나무
해안선과 나란히 높낮이 없이 한 동안 평탄하게 이어지던 길이 멀리 내수전 전망대가 보이는가 싶은 곳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내리막길의 끝은 정매화곡이다.
울릉도 특산의 말오줌나무. 딱총나무나 지렁쿠나무와 아주 닮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열매 달린 나무를 한 그루도 만나지 못한다.
나무 줄기에는 코르크질이 두껍게 발달했다.
1시간 정도 걸려서 정매화곡 쉼터에 도착한다.
석포 - 내수전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큰 계곡인 이곳은 수량이 풍부하게 흐르고 시원하여 쉼터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우리가 걷는 방향과는 반대로 내수전에서 석포 방향으로 가게 되면 이곳에서 오르막길을 맞이해야 하니 호흡을 가다듬으며 꼭 쉬어가야 할 곳이다.
넓은 공터에는 정자를 세우고 작은 공원처럼 꾸며 놓았는데, 바로 앞에는 울릉군청에서 안내판을 세워 정매화곡 쉼터 유래를 적어 놓았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 보니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정매화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이효영이라는 분에 대한 미담 이야기만 적어 놓았다.
이 골짜기에 정매화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정매화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오직 걸어서만 이 골짜기를 통해 섬의 남북을 오가던 시절인 1962년, 이효영 씨 가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1981년 이곳을 떠나기까지 20여 년간 폭설과 폭우 등으로 조난 당한 사람들을 3백여 명이나 구출했다는 것이다.
정매화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 놓은 글이 있어 원문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글을 올린 뒤 이효영씨의 아드님 되시는 분으로부터 댓글과 함께 전화를 받는다. 정매화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분(우공님)에 따르면 정매화라는 이름이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도 아니고 남자라는 것이다. 이름은 원래 정명화인데 경상도 발음으로 정멩화로 발음화던 것이 정매화로 와전되어 기록된 것이라는 것이다.그러고 보니 연전에 내가 보았던 양철 지붕에 양철 우데기가 둘러쳐져 있던 방 두 칸의 조그만 집은 이 씨 부부가 거처했던 집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그 집은 폐가가 되어 문짝은 다 떨어져 나가고, 양철이 헐고 녹슬어 음산한 모습이었다. 이 씨가 떠난 지 20년쯤 지났을 때이니 폐가가 된 것은 당연했지만, 허물어져 가는 방의 흙벽에 집주인 것인지 나그네 것인지 입던 옷가지 몇 벌이 걸려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집이 이 씨가 지어 살던 집인지, 전부터 있었던 집에 이 씨가 들어가 살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만약 전부터 있었던 집이었다면 정 여인이 살던 집일지도 모른다. 이씨가 지었다고 해도 터는 정 여인이 살던 곳일 수 있다. 이 길을 걸어 섬의 남북을 오가던 나그네들이 쉴 만한 곳은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 여인은 이 골짜기에서 주막을 차리고 오가는 나그네들 정성을 다해 접대했다고 한다. 나그네들은 정 여인의 주막에서 몇 잔의 술로 목을 축이고 땀을 씻으며 지친 걸음을 쉬기도 하고, 남북 사람들 사이의 볼 일을 서로 바꾸어 되돌아감으로써 다리품을 줄이기도 했다고 한다. 정 여인은 몸과 마음을 다해 나그네들을 접대했고, 정 여인의 인정과 인심은 나그네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져 나가면서 어느 새 이 골짜기의 이름이 정 여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 여인의 전설이 있기에 이 골짜기를 더욱 정답게 생각하고, 그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느낀다.
그러나 새로 꾸민 쉼터의 모습과 유래를 담은 안내판은 그 정다움과 아름다움을 새겨 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효영 씨의 선행은 널리 칭송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골짜기에 얽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안내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매화골 쉼터의 유래는 아니다. '정매화곡 쉼터 유래'라 하지 말고, 이효영 씨 이야기만을 담은 안내판을 세워 그의 선행을 기려야 했다. 정 여인을 말하지 말고, 차라리 구전으로만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뻔했다.
정매화골 유래를 말하려면 정 여인의 전설을 이야기했어야 했다.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설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다. 옛 이야기들 속에는 지난 날 우리들의 삶이 녹아 있기에, 옛 이야기가 풍성할수록 오늘 우리의 삶이 더욱 기름질 수 있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결국 오늘의 삶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다. 이 쉼터와 안내판이 정 여인의 전설이 자리할 곳을 잃게 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정 여인의 이야기가 이 골짜기를 떠나는 것은 이 골짜기의 아름다움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정 여인이 나그네를 정답게 맞던 이 곳에 쉼터를 조성할 수도 있고, 편안한 휴식을 위해 정자를 짓고 벤치를 설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옛 집을 꼭 헐어 버려야만 했을까. 그 집이 정 여인이 아니라 이효영 씨가 살던 집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폐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집을 없애야만 했을까. 정 여인의 전설이 어린 주막이었다면, 수많은 조난자들을 구조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던 집이라면, 깨끗하게 다듬어 전설과 미담의 현장으로 살아 있게 함으로써 이 골짜기를 더욱 아름답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 http://cafe.daum.net/libessay )
울릉군청에서조차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 채 이와 같은 안내문을 만들게 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거나 진실을 직접 말씀해 주신 우공님께 감사드린다.
정매화곡 계곡
정매화곡 다리
길가 곳곳에서 털이슬과 쇠털이슬을 만나기도 한다.
쇠털이슬에 비해 잎자루가 짧고 잎밑이 뾰족한 털이슬.
섬꼬리풀로 보이는 녀석을 만나 찍은 사진이 이렇게 실패했다. 어두워지는 숲이어서... 아직 꽃이 필 시기가 아닌가 싶은데, 꽃이 이미 다 져버린 것이 아쉽다.
숲 사이로 대섬이라 불리는 죽도가 바라보인다.
어둠에 잠기는 산속에 마가목 붉은 열매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마가목은 울릉도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다.
드디어 내수전에서 올라오는 큰 길을 만나고, 길가의 매점에서 긴 산행으로 지친 몸을 '오뎅'과 오뎅국물을 먹으며 잠시 달랜다.
내수전 전망대에 오른다.
내수전은 개척 당시에 김내수라는 사람이 화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화력발전소와 약수터가 있고 울릉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내수전과 저동. 바다 앞쪽에 북저바위가 떠 있고,
저동항 방파제 저쪽에 촛대바위가 어렴풋이 보인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해안이 내수전해수욕장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큰 해수욕장이다.
성인봉 방향
아래에 보이는 길은 저동에서 이곳으로 오르는 길이다.
내수전 뒷편의 밭들
우리가 왔던 정매화곡 방향
멀리 보이는 섬목과 관음도
관음도와 죽도
내수전 내려오는 도로는 깔딱고개라 할 만하다. 그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오는 사람도 있다.
계곡 주변에는 왕호장이 대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마을근처에 이르러 이 한여름에 하얀 꽃을 피운 아까시가 꽃을 만난다.
해가 진 내수전 해안을 배경으로 접시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내내 신선하게 느껴졌던 공기였는데, 화력발전소 탓인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마을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으로 잠시 더위를 식힌 다음 저동으로 가서 여관을 정한다.
저녁 식사는 여관 아래층 식당에서 또 삼겹살인데 아주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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