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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여행

<울릉도 여행 2> 황토구미와 태하등대의 절경, 성하신당

by 모산재 2007. 8. 12.

 

<울릉도 여행 2> 황토구미와 태하등대의 절경, 성하신당

2007. 07. 23

 

 

 

예정대로라면 어제 합류하여 1박 2일의 일정을 함께 했어야 하는데

뜻밖의 사고로 오늘에야 도착하여 오후 반나절의 일정만 함께하게 되었다.

 

울릉도의 서쪽 끝에 있는 태하등대를 돌아보기로 한다.

후배팀들은 5시 반에 출항해야 하니 서둘러야 한다.

 

7명 정원의 택시를 8명이 타고 출발한다.

택시 요금을 2만 5천원이라고 하였는데,

정원을 초과하였으니 3만원을 내야 한다고 기사는 오금을 박는다.

 

 

 

 

 

태하 가는 길은 여객선을 타고 오며 보았던 서남 해안선을 그대로 되짚어 간다.

 

도동에서 사동, 남양을 거쳐... 

 

 

 

상상 속의 울릉도 도로는 아찔한 해안 절벽 위의 비포장도로였는데,

오히려 그림같은 바다를  곁에 두고 드라이브 하는 기분이었고

아스팔트길은 아닐지라도 콘크리트 포장이 썩 좋은 길이었다.

 

도동에서 사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8자형 또아리 고가도로나

곰바위 뒤의 또아리 수층교는 절벽 같은 지형을 예술적으로 극복한 멋진 모습이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학포 만물상이 제법 그럴 듯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덧 태하항에 도착한다.

 

 

 

 

 

황토구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해안선을 따라 가니 금방 황토구미가 나온다.

 

 

화산섬에서 저런 황토가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지만

어떤 원리에 의해 저렇게 암석층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지게 되었는지는 더욱 궁금하기만하다. 

 

굴에 황토층이 있어서 황토구미라 한다는데,

'구미'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구멍'이나 '움푹 파진 땅'을 뜻한다.

 

울릉도에는 황토구미 외에도 통구미라는 곳도 있는데, 구미의 뜻은 같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황토가 조정에 상납까지 되었다고 하며,

조정에서는 3년에 한번씩 삼척영감을 이 섬에 순찰을 보냈는데,

순찰의 증거품으로 이곳 황토와 향나무를 받았다고 한다.

 

 

 

황토구미를 지나면 바다쪽으로 이어진 바위 절벽이 나타나고

절벽 허리로 철판으로 만든 다리를 연결하여 산책길을 내놓았다.

 

 

그 길을 통하여 태하등대를 향하기로 한다. 


그 길을 통하여 갯바위 위로 올라서면 울릉도의 최서단이 된다,

 

여기서부터 해안선은 동쪽으로 꺾어지게 된다.

 

 

 

바다를 향해 길게 나온 갯바위 위에 서니 바람이 상쾌하다.

 

갈매기들이 시원한 북서풍에 게슴츠레 기분 좋게 눈을 뜨고

조나단처럼 바람타기를 즐기고 있다.

 

 

 

돌아본 태하마을과 바람 타는 갈매기들

 

 

 

 

갯바위 너머는 나지막한 해안선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울릉도의 유명한 낚시터 중의 하나인 모양인데,

이름하여 대풍령 낚시터이다.

 

 

대풍령은 이곳에서 현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데

실제로는 저 앞에 보이는 산 너머 해안쪽 절벽을 가리킨다고 한다.


돛단배를 타고 뭍으로 가야했던 시절 이곳에서 바람을 기다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등대로 가는 길은 낚시터의 위쪽 얕은 골짜기로 이어진다.

  

 

 

 

산의 입구에서부터 미나리과로 보이는 흰꽃들이 지천이었는데

설마 말로만 듣던 섬바디나물일까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섬바디나물이 맞았다.

 

 

 

해국이 벌써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철이 지나긴 했지만 울릉도 특산 섬기린초도 군데군데 꽃을 보여 준다.

 

 

 

 

도둑놈의갈고리도 환하게 꽃을 피웠다.

 

 

 

 

역시 울릉도 특산의 섬초롱꽃도 흔하게 보인다.

 

 

 

 

 

태하등대(울릉도항로표지관리소)까지 가는 길은  30분 정도 산길을 계속 올라가야 했다.

 

 

숲속에는 군데군데 이곳사람들이 부지깽이나물이라고 부르는 섬쑥부쟁이,

취나물이라고 부르는 울릉미역취를 기르는 밭들이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나물을 얻는 채소로 이것들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태하등대(울릉도항로표지관리소)...

 

전망이 탁 트인 해안 절벽 위의 구릉에 태하등대가 서 있었다.

 

바다로부터 111m 높이.

 

유인등대로서 광파표지(18마일), 음파표지, 전파표지(100해리)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곳 등대에서 보는 일몰과 오징어잡이 야경이 정말 장관이라고 한다.

 

 

 

양지쪽에서 키 낮게 자란 섬바디나물을 담아 보았다.

 

잎을 보아서는 바디나물과는 전혀 닮은 점이 없는데,

어째서 바디나물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없다.
 

 

 

 

한국10대 절경의 하나라고 하는,

등대 앞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현포 해안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향목령(상나무재),

(향목은 향나무를 가리키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상나무)

 

 

그 너머 방파제로 둘러싸인 곳이 현포항,

섬은 꼬끼리바위 또는 공암,

앞에 솟아 있는 작은 바위는 노인봉,

뒤에 높게 솟아 있는 바위는 송곳봉이고,

송곳봉 너머에 추산리가 있다. 추산(錐山)은 '송곳봉'의 뜻을 가진 말이다.

 

 

 

 

지도와 비교해 보면 좀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꼬끼리바위(공암)와 현포항을 좀더 가까이 당겨서 담아 보았다.

 

 

 

 

바로 앞 절벽 아래의 바다의 환상적인 물빛

 

 

 

 

등대의 서쪽으로 보이는 대풍령  절벽

 

이 절벽은 울릉도의 해안선을 서쪽과 북쪽으로 가른다.

 

 

 

 

대풍령(待風嶺)은 돛단배가 뜨기 위해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절벽 꼭대기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데 그 크기는 수십미터 이내의 큰 구멍이지만,

옛날  배를 매어두기 위해 이곳에 구멍을 뚫어 배를 매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있다. 


이 바위 절벽은 천연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된 향나무 자생지이기도 한데,

절벽과 심한 해풍의 영향으로 성장이 빠르지 않으며 오랜 세월 동안 격리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한 괭이갈매기들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절벽 아래에는 홍합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군데군데 해식작용에 의한 해안동굴들이 있다. 

 

 

 

이 동굴에 얽힌 이야기 하나!

 

초봉산(윗사진의 등대 뒤로 보이는 산) 너머 진등대라는 곳에 큰 수직동굴이 있는데

여기에 빠진 염소가 대풍령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땅속으로 지하동굴이 이어져 있다는 것인데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로 떠돌고 있다.

 

 

 

 

 

되돌아오는 길에 만난 풀꽃나무들

 

되돌아 올 때에는 마을 뒤쪽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허릿길로 온다.

 

훨씬 편하고 운치가 있는 길이었지만 시간에 쫓겨 바쁘게 와야 했다.

 

 

 

길쭉하게 자란 동백나무 열매

 

 

 

 

참나리

 

 

 

 

쇠털이슬

 

 

 

 

 

섬매말톱나무

 

 

 

 

누리장나무

 

 

 

 

학포의 만물상이나 남양의 거북바위, 투구봉 등 해안 명소들도 돌아봤으면 좋겠지만

후배 팀들이 배를 타야 하는 시간이 빠듯해서 도동으로 급하게 되돌아가야 했다. 

 

 

 

 

성하신당

 

사전 공부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후회할 일이 생겼다.

 

바로 이 마을에 성하신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 찾아볼 생각인들 했겠는가!

 

나중에야 그 존재를 확인하고 땅을 칠 수밖에...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아마도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를 전하고 있는 신당에 대한 정보는

황토구미마을 홈페이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http://hwangtogumi.invil.org/)

 

 

 

 

조선 태종시(1417년) 삼척인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로 명하여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거주민을 본국으로 데리고 오는 일)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동에 도착하여 이곳을 유숙지로 하고 도내 전선(全船)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내일이면 출발 귀임(歸任)할 작정으로 취침 중 이상하리만치 기이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남녀 2명(童男童女)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가 있어서 안무사는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별로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나 구애됨이 없이 다음날 출항할 것을 결심하고 날이 밝아짐을 기다리는 중 예기하지 않던 풍파가 돌발하여 출발을 중지하고 풍파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멎을 기세 없이 점점 심해 가기만 하였다. 

 

수일간은 이렇게 기다리던 중, 안무사는 문득 전일의 현몽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동남동녀 2명에게, 일행이 유숙하던 곳(가옥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니 유숙하던 장소로 추측됨)에 필묵을 잊고 왔으니 찾아올 것을 명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둘은 발길을 재촉하여 총총히 밀림사이로 사라지자 그렇게 심하던 풍랑은 거짓말처럼 멎어지고 항해에 적당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결국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출항할 것을 명하니 배는 순풍을 받고 일시에 포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속은 줄도 모르는 어린 남녀는 아무리 찾아도 필묵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는 벌써 수백리 해상에서 쾌조로운 순풍을 타고 육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이 두 동남동녀의 심경은 오죽했으랴? 땅을 구르며 고함을 쳤으나 배는 어느 듯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망스러워 울부짖던 두 어린 남녀는 이제는 지쳐 어쩔 수 없이 본래 유숙하던 자리로 돌아왔으나, 날이 감에 따라 공포와 추위,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은 죽어갔을 것이다.

 

한편 안무사는 무사히 본국으로 귀착하여 울릉도 현황을 복명하였으나 당시 연민의 정과 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 수년 후 재차 울릉도 안무(按撫)의 명을 받고 입도(入島)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에 태하동에 상륙하여 수색을 하였던 바 전년에 유숙하던 그 자리에 두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白骨化)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무사는 이 정황을 보고 회한에 찼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혼령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 곳에다 간단한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귀임하였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농작이나 어업의 풍년도 소원하고 위험한 해상작업의 안전도 빌었다. 그리고 신조 선박의 진수(새로 만든 배을 처음으로 물에 띄움)가 있으면 꼭 태하의 성하신당(성황당)에 제사하여 해상작업의 무사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