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중국 운남 여행 (9) : 시솽반나 지눠족 마을과 아이들, 빨래하는 여인

모산재 2007. 2. 10. 15:35

 

 

 

중국 운남 여행 (9) 시솽반나(西雙版納)의 지눠족 마을과 아이들, 그리고 빨래하는 여인

2007. 01. 23

 

 

 

 

어젯밤 징홍(景洪)으로 날아와서 잠자리를 정한 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나무야'라는 게스트하우스. 홍등가가 자리한 징홍의 변두리 지역이다. 

 

홍길씨가 한턱 쏘는 상추 삼겹살에 저녁을 얼마나 맛나게 먹었던가. 그리고 밤거리를 맨발로 활보하다가 길거리 술집에서 또 한잔. 또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느 녀석의 시비에 기분 잡쳤다고 또 나가서 한잔!

 

 

숙소 나무야 게스트하우스

 

 

 

 

징홍에서의 일정은 리지앙(麗江)행 비행기 사정으로 널널하다 못해 늘어질 지경이다. 가야할 곳이라곤 열대식물원과 감람바 정도인데 모레 오후 늦은 시간에야 이곳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곳 징홍(景洪)은 85만의 인구가 사는 시솽반나(西雙版納) 태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이다. 윈난성의 최남단에 자리잡은 인구 12만의 작은 도시로 남쪽으로는 라오스와, 서남쪽으로는 미얀마가 접해있다. 윈난성 북부의 험준한 지형과는 달리, 이곳은 태국과 다름없는 남국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매리설산과 더친에서 흘러내린 란창강이 울창한 열대 우림의 분지인 이곳을 통과하여 베트남에서는 메콩강으로 넓어진다. 해발이 가장 낮은 지역이 447미터이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우림형인데, 5-10월이 우기인데 지금은 건기이다.

 

시솽반나는 북회귀선이 지나가는 곳으로 4000여 종이나 되는 다양한 식물들이 서식하는데 '왕관에 박혀있는 녹보석과 같은 식물 왕국'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곳에는 따이족, 지눠족, 부랑족, 하니족 등이 살고 있으며 징홍시를 포함하여 1개시, 2개현, 40개진이 있다. 이들의 고유명절인 포슈이지에(潑水節) 행사에 뛰어들어 물벼락을 퍼붓는 경험을 해본다면(아쉽게도 나는 못하고 말았다.) 최고로 유쾌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아침 8시에 일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으로 죽을 먹는다. 오늘은 버스로 3시간 걸려야 갈 수 있는 열대식물원을 가기로 한다. 건수, 웬양에서는 한국에서 입었던 겨울 복장 그대로 다녔는데, 해가 뜨자 이곳은 확실히 덥다. 9시 반, 반팔 차림으로 나선다. 란창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시솽반나대교를 건너 남동쪽으로 합승버스는 달린다.

 

 

몇번이나 건너 다녔던 시솽반나대교 (나중에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담은 장면이다)

 

 

 

 

 

도도히 흐르는 란창강을 줄곧 오른쪽으로 끼고서 하류 방향으로 버스는 달린다.

 

라후족이라는 현지 가이드 아가씨가 타이족, 지눠족 등에 대한 설명을 하고 병규씨가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타이족 아이들은 4~5년 승려생활을 하는데 승려생활 중에도 여자 친구를 사귀며, 승려생활을 그만두면 비지적으로 여겨진다, 결혼을 하려면 3년간은 데릴사위 노릇를 해야하는데 그러고도 여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겨나기도 한다, 그런데 안경 쓴 사람은 1년 반만 할 수도 있다. 지눠족은 외삼촌을 공경하는데 그만큼 외삼촌의 영향력이 크다. 등등

 

달리는 길가에 작은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에는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 일교차가 큰 탓일 게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된다.

 

타이족은 수이타이, 화이타이, 한타이로 나눠지는데, 수이타이는 흰 옷을 입고, 화이타이는 끈 달린 옷을 입고, 한타이는 검은 옷을 입는다. 타이족은 얼굴이 희고 몸매가 날씬한데, 하니족은 얼굴이 검고 검을수록 미인으로 생각한다, 타이족은 하니족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 5000명 미만의 원시족인 라후족은 나무 위에 사는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장대로 건드려서 사랑의 뜻을 표현한다. 등등

 

그리고 나무 1톤에 2만 위안이나 한다는 상자오橡晈)라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 가구와 프로펠러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신발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하며 열매는 사료로 사용한다는... 그리고 길가의 가로수가 열매를 기름 짜는 데 사용하는 유종수(油棕樹)라는 이름의 종려나무라고...

 

 

 

가는 도중 잠시 과일가게에서 휴식

 

 

 

 

가게 뒤에 펼쳐진 파인애플 밭

 

 

 

 

아욱과로 보이는 꽃. 찾아보니 Urena lobata 일듯...

 

 

 

 

 

 

그리고 도착한 지눠족(基諾族) 마을, 바카 기락족 문화 생태촌!

 

예비지식 없이 여행을 왔다가 지눠족이란 말도 처음 들었는데, '진어족'인 줄만 알았다. 알고보니 1979년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마지막으로 인정 받은, 전체 인구수가 2만여 명 정도인 소수민족이다.

 

 

 

 

포드기금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모양이다.

 

 

 

 

마을 입구에 언덕에는 낯선 꽃들이 피어 있다.

 

털이 나 있는 거친 잎에 샛노란 꽃을 피운 나팔꽃 종류, 포도잎나팔꽃.

 

 

 

 

이곳에서 처음 본 뒤 징홍 주변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나중에 찾은 중국 이름은 장엽어황초(掌叶鱼黄草), 학명은 Merremia vitifolia. 건기인 2~3월에 메마른 언덕에 피는 메꽃과의 덩굴식물이다.

 

 

또 하나, 긴화관을 가진 하얀 꽃.

 

 

 

가운데 선이 보이는 꽃잎, 샘털이 숭숭한 꽃받침 등의 특징이 플룸바고 종류이다. 우리에게 원예화인 이 꽃이 여기선 야생화로 피고 있다.

 

 

지눠족 민가

 

 

 

 

 

우리 시골 동네처럼 마을 가운데로 언덕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서 오르는데 개들이 달려 들어서 제대로 살펴 보지도 못하고 철수하고 만다. 개들이 워낙 사나워 접근하면 위험하단다.

 

 

 

마을 앞 개울 위로 걸려 있는 출렁다리를 건너 개울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풀꽃들을 살핀다.

 

 

망초처럼 자주 보이는 잡초의 꽃.

 

 

 

줄기에 빽빽히 들어선 털이나 술 같은 꽃모양이 불로화로 불리는 아게라텀 종류다. 멕시코엉겅퀴라고 불리는 꽃과도 아주 닮았다. Ageratum conyzoides(藿香蓟)나 Ageratum houstonianum(熊耳草) 둘 중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망초를 닮은 작은 풀꽃.

 

 

 

 

 

개울에서 물고기잡이에 나선 아이들. 예전의 우리 시골 아이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지눠족 마을 방문은 이것으로 모두 끝나 버렸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열대식물원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 도중의 길가 식당에서의 점심식사 시간

 

 

저 멀리 란창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 본다.

 

 

 

 

점심은 밥이었는데 빨리 먹은 후 나 혼자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란창강을 구경한다. 빨래하는 여인 곁에 또 한 여인이 나타났다.

 

 

 

 

 

 

 

풀꽃들을 살피러 란창강가로 내려서본다.

 

하지만 눈에 띌 만한 풀꽃들은 없다. 이곳의 흙은 먼지 같아서 아무리 살살 조심해서 밟아도 아랫도리는 금방 허연 흙먼지투성이다.

 

 

아까 빨래하던 곳 주변에는 어느새 벌거숭이 아이들이 나타나 물장구도 치고 있고, 여인네 수도 늘어났다. 동네 빨래터인가 보다.

 

 

 

 

멀리 어깨를 드러낸 채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도 눈에 띈다.

 

 

 

 

동네 빨래터를 흘끔흘끔 훔쳐 보다가 돌아나오니 언덕 위의 파파야 나무에 꽃이 피었다. 처음 보는 파파야 꽃!

 

 

 

 

 

점심을 다 먹고 이미 차에 타고 있던 일행들이 빨리 오라고 아우성이다.

 

 

 

 

 

■ 지눠족(基諾族)에 대하여

 

2000년의 통계에 따르면 지눠족은 모두 20,899명에 달한다. 시솽반나(西雙版納)주의 지눠(基諾)山과 푸위엔(補遠)山에 살고 있다. 주로 시솽반나따이족자치주 경홍현 지눠민족향에 집거해 있고 일부분이 경홍현 맹왕(孟旺), 맹양(孟養), 감람패(橄欖覇), 대도강(大渡崗)과 맹랍(孟臘)현의 상명(象明), 맹륜(孟侖) 등지에 분산되어 운남의 지눠산에 살고 있고, 그로 인해 지어진 이름이다.

1979년 6월 중국 운남성의 지눠족이 단일한 소수민족으로 마침내 확정되었고, 이들은 중국에서 최후로 확립된 소수민족이다. 이때부터,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고 확정된다. 지눠족은 인구수는 많지 않지만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지눠족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의 조상은 삼국시대 제갈량의 남정 부대의 일부분이고, 대부대가 해산된 후에 남아서 형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이(普洱), 묵강(墨江) 그리고 북방으로 옮겨서 거주했다. 이로 인하여 지눠족은 제갈량을 신봉한다.

'지(基)'는 외삼촌이라는 의미이고, '눠(諾)'는 후대라는 의미가 있다. 이 말은 합쳐서 외삼촌을 매우 존중하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이름에는 모계중심사회를 형성했었던 흔적을 보여준다.

마을은 태양을 마주하는 산기슭에 위치한다. 지눠산은 운남성의 유명한 푸얼차(普耳茶)의 6대 재배지 중 하나이다. 지눠족이 집거한 지눠산은 열대산지역에 속하며 토지가 비옥하고 강우량이 충족하다. 이곳은 이름난 차잎 생산지로서 국내외에서 유명한 6대 차잎 생산지이다. 지눠족은 옥수수와 콩 등 밭농사를 주로 짓는데, 아직도 화전(火田)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열대 과일과 찻잎, 고무 등도 최근 들어 경제 수입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농사 이외에 남자는 부업으로 사냥을 하거나 대나무 제품을 만들고, 부녀들은 옷감을 짜거나 야생식물들을 채집한다. 주식은 쌀과 옥수수이고, 찹쌀은 주로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한다. 채소들은 심어서 먹기도 하지만 야생식물들이 많아서 채소를 대신하기도 한다. 이들은 음식을 할 때 대부분 찧어서 만든다. 그래서 이들은 "한족은 볶아서 먹고, 따이족은 양념을 찍어서 먹고, 지눠족은 찧어서 먹는다."고 말한다. 이들의 음식은 맵고, 짜고, 시게 먹는다.

지눠족의 가옥은 대나무를 사용하고 짚으로 지붕을 얹어서 2층으로 만든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2층이고 1층은 사방의 벽이 없다. 1층에는 농기구 등을 놓아두거나 가축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된다. 2층의 방은 여래 개를 만들어 노인, 부부, 자녀 등을 구분해서 사용하는데, 손님을 위한 방까지도 만든다. 집의 중앙에 화로가 있고 10명에서 20명의 대가족이 함께 사는데 각자 작은 화로를 가지고 있다.

지눠족은 15, 16살이 되면 성년식을 행하는데, 이 성년식을 거쳐야 연애를 할 수 있게 된다. 연애는 자유롭게 하고 부모는 일반적으로 간섭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필히 외삼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지눠족의 결혼은 1부1처제이다. 혼인전의 연애는 자유이나, 결혼후에는 이혼하는 경우가 드물다. 지눠족의 청년 남자는 "성년식"을 거행한 후에 연애할 자격이 생기고,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나뭇잎으로 신표를 삼아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두 사람의 뜻이 맞으면 바로 동거한다. 일반적으로 첫번째 아이를 낳은 후에 결혼식을 한다.

지눠족의 역사는 몇 가지의 전설에 의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문자로 정리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 정사인지는 아직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지눠족의 조상이 거주하던 곳은 본래 '지눠(基諾)'산이 아니고, 지눠산 부근의 '쥬어지에(卓杰)'산의 산등성이었다. 차츰 환경에 의해 이주하여 거주하게 된 곳이 '지눠'산이고, 그 산을 '지눠'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들의 이름을 따라서 부르게 된 것이다. 지눠족은 혈연사회 시기에 모계중심적인 사회구조를 갖고 살았었고, 약 2-300년 전에 부계중심사회로 전환을 하였는데, 점차로 생산력의 발전함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의 첫 계단에 발을 딛게 되었다.

중국의 중앙정부가 이 지눠(基諾)족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청조(淸朝)시대부터였는데, 직접 관을 세우고 병사를 파견하여 다스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지만 청(淸)정부가 따이(Dai)족 '투쓰(土司;세습추장)를 파견하여 다스린 시간은 길었고, '투쓰(土司)'는 매년 지눠족에게 일정한 양의 곡식을 바치도록 했다. 따라서 지눠족의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1940년대 중화민국 시절에도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많아서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고, 1941년부터 1943년사이에 지눠족이 봉기하여 생산력이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전체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를 겪어왔다. 짧은 역사 속에서 이들은 외부세력에 의한 어려움이 계속되어 왔다.

인구는 적은 민족이지만 '요우러(攸樂)', '푸위엔(補遠)'등 두 종류의 방언이 있고 문자는 없다. 지눠산 일대에서 사용하는 '요우러(攸樂)'방언이 주된 언어로써 90%정도의 인구가 사용한다. '푸위엔(補遠)'방언은 10%정도의 인구가 사용하는데, 두 방언은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다. 본래 문자는 없었고 1983년 라틴자모를 기초로 해서 병음법으로 만들어내긴 했으나 아직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실용성을 시험하는 단계에 있다. 지눠족 복장은 청색, 홍색과 흑색의 줄무늬의 수공으로 짜여진 천으로 만들어지는데 매우 화려하다. 남자의 상의는 꽃을 수놓은 천으로 소매가를 두른 깃이 없는 흰색의 마로 만든 옷을 입고, 하의는 흰색, 또는 푸른색의 긴바지를 입는다. 여자는 화려하게 수놓은 천으로 장식된 깃이 없는 상의를 입고, 하의는 붉은색으로 테를 두른 검은색 짧은치마로서 앞이 트여 있고, 겹쳐있는 형태이다. 근래에 들어서 긴 치마도 입고, 다리를 천이나 끈으로 두르기도 한다. 머리에는 흰색의 두꺼운 마로 만든 삼각형의 모자를 쓰는데 이는 지누족의 기원설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인류의 정신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다. 남자나 여자 모두가 귀에 구멍을 내는데, 구멍이 클수록 아름답다고 여긴다.



 <사진은 http://cafe.naver.com/shanglila2004에서 인용>

 

지눠족은 만물에 영이 있다고 믿으며, 조상과 자연을 숭배한다.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조상을 신으로 섬긴다. 마을의 신은 마을 장로의 부계조상이다. 지눠족의 생각에는 자신들이 생활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귀신이 있는데, 신과 귀신, 선인 등을 구분하는 개념이 없고, 모든 섬기는 대상을 '나이(乃; 일종의 귀신)'라고 부른다.

지눠족의 장례풍습 중에는 수장제가 일부 남아 있다. 약간의 생산공구과 의류 등을 함께 수장한다. 노인이 죽었을 경우에는 시체를 집에 두는 동안 그의 옆에 부채와 수건을 놓는다. 그 의미는 사자(死者)가 길을 가는 동안 땀을 닦고 식히면서 가라는 것이다. 만약 부친이 사망했을 경우는 그 아들은 당일에 삭발을 하고 몸에 있는 모든 장식품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3개월 안에 모자 등을 써도 안된다. 부모가 사망했을 때에는 군링부(滾靈布)라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이것은 모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일종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출상을 할 때는 쌀을 뿌리고 총을 쏘아서 귀신을 쫓는다. 하관 후에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직접 돌아가지 않고, 풀 등을 이용해서 자신의 발자국을 지운다. 만약 발자국이 남으면 귀신이 발자국을 따라서 집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서도 직접 들어가지 않고 집을 한바퀴 돌고 난 후에야 집으로 들어간다. 지눠족은 모든 마을마다 공동묘지를 갖고 있는데, 이 묘지는 마음대로 확장할 수 없고, 중병을 앓았다거나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 공동묘지에 묻힐 수가 없다.

지눠족은 결혼과 관계된 금기가 비교적 많다. 신랑과 신부의 생일과 쌍방 부모의 기일에 결혼을 해서는 안되며, 7과 9가 들어가는 날(7, 17, 27, 9, 19, 29일)과 매월 15일 이후는 피한다. 그리고 남자가 19살인 해와 여자가 17살인 해는 결혼을 할 수 없다. 지눠족은 남자는 9자를 금하고, 여자는 7자를 금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에 2층에서 낳을 수 없다. 대부분 아래층의 찻잎을 말리는 방을 이용하거나 양식창고에서 출산을 한다. 분만이 끝난 후에나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산모는 한달 동안 고기 종류를 먹을 수 없고 오직 야채와 물고기만 먹어야 한다. 아기가 태어난지 꼭 한 달이 되는 날 아기의 부모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야채나 사냥한 동물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고, 외부인은 절대로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불길한 것들이기 때문이며 해가 지면 이런 금기가 해제된다.

 

○ 주요 절기

1) 터모체(特毛切)

터모체는 지눠족이 신년을 지키는 절기로서 정해진 날이 없으며 다티에제(打鐵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한 여인이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뱃속에 9년 9개월 동안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갈빗대가 있는 옆구리가 심하게 아프더니 뱃속의 아이가 갈비뼈 7개를 물어뜯고 스스로 나오는데, 남자 아이였다. 이 아이는 뱃속에서 나올 때 한 손에 쇠망치를 들고, 한 손에는 불집게를 들고 나왔다. 이 아이는 나오자마자 탕탕탕 가지고 나온 것을 두드려서 칼도 만들고, 호미, 괭이 등 농기구들을 만들어 냈다. 지눠족은 이때부터 철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날을 다티에제라고 부르며 신년으로 지키게 되었다.

지눠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절기인 다티에제는 음력 12월부터 다음해 2월 사이에 지키게 되는데, 마을마다 지키는 시간들이 다르다. 각 마을은 모두 父와 母의 마을들이 있는데, 먼저 이 마을들에서 절기를 지키고 그 다음에 아들 마을에서 지키게 된다. 마을의 장로들이 농사의 일정을 참고하여 절기의 시간을 정하고 또 마을 행사들도 결정을 한다. 절기가 시작되면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커다란 나무북을 두드리며 신년을 알리고 절기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두드린다. 이 나무북은 평상시에는 줘바(卓巴-마을의 아버지), 줘성(卓生-마을의 어머니)의 집에 보관하는데, 절대로 누구도 만질 수 없다. 나무북에 얽힌 전설을 보면 아주 오래 전 산까지 잠기는 홍수가 있었는데, 이때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 오직 남매인 남자 아이 마리(瑪里)와 여자 아이 마시(瑪細)만 살아 남았다. 이 남매는 커다란 나무북 속에 들어가서 나무북과 함께 7일 동안 표류하다가 닿은 곳이 여우러산(攸樂山)이었고, 홍수는 차츰 물러갔다고 한다. 이 남매가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지눠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래서 이들은 나무북을 신성하게 여긴다.

2) 지따롱(祭大龍)
지따롱은 지눠족의 시조 중 여인을 기념하는 날로서 일반적으로 6월에 3일 정도 지킨다. 이 시조는 지눠족이 거하는 지역의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데, 이 시조가 죽자 지눠족은 13일 동안 그를 추모하였다. 이 절기는 이 여인 시조가 죽은 것을 추모하는 날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켜 내려오고 있다. 이 날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외출을 금하고,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가서도 안되며, 마을 안에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춘다든지 큰 소리로 떠들어서도 안 된다. 이는 시조를 무시하는 행위로 지눠족의 풍속을 어기는 죄를 범하는 행위들로 간주한다.

3) 신미지에(新米節)
중국의 서남민족들 중에는 이 신미지에를 지키는 민족들이 많다. 오래 전 지눠족은 깊은 산 속에 살면서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심어먹을 곡식도 없었다. 그들은 사냥과 야생식물들을 채집하는 등 원시적인 생활을 해나갔다. 어느 날 한 마리의 개가 매우 먼 곳으로부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곡식을 물고 왔다. 한 노인이 보고는 개가 일반적인 개와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한편으로는 개를 기르면서 한편으로는 산등성이에 개가 가져온 곡식을 심었다. 이때부터 지눠족은 농사를 짓게 되었으며,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시기에 이 신미제를 지키게 되었다. 이 절기를 지킬 때면 거두어들인 곡식을 창고에 두고, 닭을 담은 광주리를 메고, 안에는 은으로 만든 장식품들과 은전 등이 담겨있는 갈대로 만든 작은 상자를 들고 밭으로 간다. 밭에서 갈대상자를 흔들면서 곡식의 혼을 부른다. 밭에서 곡식의 혼을 부른 뒤 집으로 돌아갈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만약 뒤를 돌아보면 곡식의 혼이 부끄러워서 주인과 함께 곡식 창고까지 갈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음해의 수확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번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꽃을 이쁘게 꽂은 볏짚단을 길에 놓고 간다. 집에 도착하면 닭과 돼지를 잡고 닭의 머리와 돼지의 머리를 곡식창고의 문에 걸어두어 곡식의 혼에게 준다. 곧 내년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때 젊은이들은 산에 가서 이웃 마을의 젊은이들과 대가(對歌)를 부르며 일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찾기도 한다.

< 이 자료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짜깁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