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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운남 여행 (6) : 건수(젠수이) 단산마을과 장가화원

모산재 2007. 2. 5. 00:06

 

중국 운남 여행 (6)  건수(建水) 단산(團山) 마을과 장가화원(張家花園)

2007. 01. 21

 

 

 

 

쌍룡교에서 나와 다시 단산마을 장가화원(張家花園)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황룡사라는 절이 많이 찾는 곳인지 황룡사행을 표기한 마이크로버스가 자주 보인다.

 

건수의 서쪽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 단산(團山, Tuanshan)마을은 원래는 이족 마을이었는데, 명나라 홍무 연간에 강서(江西)의 장씨(張氏)들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한족 이민과 토착민이 어울린 마을을 이루었단다. 단산마을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가가 장가화원이다. 단산이라는 이름은 이족어를 음역한 말로 "금과 은이 묻혀 있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단산마을 골목으로 들어가는 대문. 일종의 성문인 셈인데, '단산촌(團山村)'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들어서면서 본 특이한 풀꽃.

 

줄기 모양이 지느러미엉겅퀴를 연상시킨다. 찾아보니 Laggera pterodonta. 중국 이름으로는 익치육릉국(翼齿六棱菊). 날개에 톱니가 있고 여섯 개의 능선이 있다는 뜻인 듯...

 

 

 

 

 

또 하나의 특이한 풀꽃. 이름을 찾아보니, 부들레야로 중국 이름으로 밀몽화(密蒙花), 학명은 Buddleia officinalis.

 

 

 

 

 

 

9세기 말 운남의 시골 특색과 사회인문 환경을 담은 단산은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이족 건물이 융합된 건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별 예비 지식이 없이 옛 건물을 감상하려니 뭘 주목해야 하는지 몰라 그냥 시선이 가는 대로 보기로 한다.

 

 

문살 장식에 쓰인 목재는 호두나무라고 한다.

 

 

 

 

 

호박 모양의 주춧돌

 

 

 

 

 

 

 

여기가 장가화원의 대문이다.

 

 

 

 

 

 

바깥에서 보면 원형의 문, 안에서 보면 방형의 문. 중국의 가옥에서 흔히 보이는 구조다. 외부에 대해서는 원만함을,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함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이 문을 지나면 연못이 있는 안채가 나타난다.

 

 

 

 

 

안채의 화려한 장식

 

 

 

 

 

 

 

 

호박 모양의 주춧돌이 이족의 고유한 양식인 듯...

 

 

 

 

 

장가화원에는 21개의 오래된 가옥들이 들어서 있고, 각 가옥들마다 문과 정원 등의 공간 경관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리고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장식적 조각과 그림은 현란하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건물들과 빈틈없는 장식들이 화려하긴 하지만 그리 편안하지가 않다.

 

 

 

마을 뒤로 빠지는데, 거대한 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나무의 이름이 '용수(榕樹)'라고 한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이 나무 아래서 득도하였다는 상록수인 벵골보리수일텐데 수형이나 잎 모양이 달라 보인다.

 

마을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 놀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어린 시절 나도 이렇게 놀지 않았던가. 사진을 찍으니 아이들은 시선을 피한다.

 

 

 

 

 

 

이 나무 왼쪽 위로 커다란 성문이 나 있어서 이곳이 비로소 성으로 된 마을임을 깨닫는다.

 

 

이 마을은 다른 전통마을과는 달리, 마을에 4개의 문을 만들어놓고(현재는 3개만 남았다.) 성과 같은 요새를 만들어 마적들로부터 마을을 방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민공화국 원년에 마적단 100여명이 7일 밤낮으로 공격한 적이 있었지만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요새화하였다는데, 그럼에도 내 눈에는 그저 평화로운 민가를 돌아보았다는 느낌뿐 요새라는 것이 실감되지는 않는다.

 

 

 

이곳은 문묘(文廟)이면서 학교로 쓰인 공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향교나 서원 같은 공간인 듯하다.

 

 

 

 

 

지금은 폐쇄되어 있지만 왼쪽 건물 안에는 낡은 칠판이 걸려 있고 책걸상들이 쌓여 있다.

 

 

 

 

 

 

골목을 돌아나오다 높다란 지붕 위에 핀 꽃을 발견한다. 지붕에 저런 꽃식물이 자란다는 게 너무 신기해 모두들 셔터를 누르는데...

 

 

 

 

 

나중에 보니 이곳의 지붕에는 이 꽃이 흔하디흔하게 피고 있는 거였다. 여행을 안내해 준 병규씨가 전하는 꽃 이름은 '태양산(太陽傘)'이란다. 나중에 알고보니 천손초와 같은 칼랑코에속의 원예종 금접(Kalanchoe delagoensis)이란 것이다.

 

 

 

 

 

 

 

마을 앞으로 나서자 들판을 앞에 두고 우물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 사람들을 만난 듯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우물가에 핀 란타나와 붓꽃 종류

 

 

 

 

 

 

그리고 마을 가룬데 자리잡은 대성사(大成寺)라는 절은 특이하다.

 

그저 사천왕이라 생각하고 스쳐 지나간 불상이 뭔가 이상해 뚫어지게 살펴보니, 세상에...

 

삼국지의  인물들 아닌가! 가운데가 유비와 공명, 양쪽으로 관우와 장비. 이들이 이 절의 사천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음보살상

 

 

 

 

 

그리고 '대웅보전'이란 이름의 법당.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이름인 줄 알았는데...이곳에서도 쓰고 있다.

 

 

 

 

 

모셔진 삼존불은 얼른 보기에도 조야한데, 규모나 예술적인 면에서 사천왕격인 유비, 공명, 관우, 장비상에 비해서 초라하다.

 

 

 

 

 

 

마을을 나오면서 공터나 주변 들 언덕에서 만난 꽃들을 담아 본다.

 

 

 

관목처럼 공터 언덕 곳곳에서 맘대로 자라는 란타나 꽃.

 

 

 

 

 

이곳 산야에 흔히 보이는 세네치오속의 천리광(千里光)이라는 풀. 마을 주변에 잡초처럼 자란다.

 

 

 

 

 

그리고 초롱꽃과로 보이는 풀꽃이 논언덕에 피어 있다.

 

 

 

 

 

벨로페로네 또는 새우풀(Shrimp Plant)로 불리는 풀이 정원에서 자란다.

 

 

 

 

 

골목을 따라 이런 건물의 문을 지나고 ...

 

 

 

 

 

억센 가시를 달고 있는 도깨비가지를 닮은 이 식물은 마을 주변 공터에 흔히 보인다. 찾아보니 중국 이름으로는 자천가(刺天茄)라 하는데, 학명은 Solanum khasianum..

 

 

 

 

 

마을 담장에는 폭죽처럼 생긴 꽃이 활작 피었다. 중국 이름으로 포장화(炮仗花). Pyrostegia venusta라는 학명을 가진 이 꽃은 능소화과의 여러해살이 덩굴식물이다.

 

 

 

 

 

오늘 보기로 했던 공자묘는 내일 보기로 하고 호텔 로비에서 모여 잠시 맥주 한잔...

 

 

 

 

 

 

그리고는 숯불구이집이 문을 여는 시간까지 시내를 한 바퀴 돈다.

 

 

그리고 호텔 건너편 골목 샤오카오(烧烤, 숯불구이) 집에서의 저녁식사.

 

보다시피 애벌레, 잠자리, 잠자리 유충, 메뚜기 구이들이 이곳의 주종목이라는데, 이 밤을 어떻게 견딜 것인지 부담이 확 온다.

 

 

 

 

 

 

비위 좋은 몇몇 분들은 잘 먹었지만, 대부분은 이 초두부구이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건수가 자랑하는 유명한 음식이 꿔챠오미센과 초두부라고 하는데, 초두부라는 것은 그저 먹을 만할 뿐 맛있는 줄은 모르겠다.

 

모과주라는 독주도 몇 잔 돌았는데 독한 술 기운과 모과의 엷은 향이 따로 놀아서 인상을 쓰고 마신다. 이런 날 술맛까지 돕지 않는다. 도사님이라고 불리는 이 선생님도 벌레와 독주 앞에서 완전히 무릎꿇었다.

 

 

 

 

 

그래도 기념사진 한번 찍었다. 11박 12일의 우리 여행에서 아마도 유일한 단체사진이 된 것같다.

 

 

 

 

 

대부분 숙소로 들어가 버리고 건수 시내의 맥주집을 찾아 한잔 더 즐긴다.

 

 

 

 

 

 

※ 단산(團山) 마을과 장가화원(張家花園)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장산이라는 한 남자가 포양에서 일을 보러 단산(團山)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단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단란한 생활에 반해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장이 이곳에 정착한 이래로 그들은 관대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높은 교육과 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런 연유로 농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자손들은 사회 주요인사 및 학자, 정치가를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장가화원(張家花園)출신이라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청 말기 단산 사람들은 개구(个旧)시에서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그들은 은(銀)을 말에 싣고 돌아와 농장과 많은 집들을 사들였다, 또한 그들의 부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들의 집의 기둥 및 처마, 문 등에 여러 가지 문양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청 말기 1900~1910년에 건설되었던 이 찬란한 장가화원은 그 후, 50년 동안, 그들의 옛 영광을 서서히 잃어갔다. 정부에 의한 단산의 광산투자는 점점 줄어 들었고 그들은 그들의 광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동산을 팔아야 했으며, 점점 파산에 이르렀다.

물론 광산들이 점점 파산에 이르러 단산의 몰락과 함께 장가화원(張家花園)도 몰락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나, 장가화원의 좀 더 다른 시각측면에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면, 1949년 이전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장가의 일가들은 홍콩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것을 공산당이 몰수, 지주가 아닌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하였으며, 그 후, 장가화원은 그들의 무지함과, 또한 문화혁명에 의하여, 많이 훼손되었다. 이후, 점점 장가화원은 그들 자신에게서조차 잊혀져 감에 따라 밀수업자 및 브로커들의 표적이 되었으며, 이에 의하여 많은 건물들의 장식들이 도난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