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3

팔순 노모, 메밀묵을 만드시다

설 명절을 사흘 앞두고 늙으신 어머니 혼자 계시는 고향집으로 갑니다. 아버지 차례상에 올릴 제수 장도 봐야 하고, 사랑방 난방을 위해 땔감도 해야 하고, 산소 주변 찔레와 칡덩굴 얽힌 덤불도 쳐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내리던 비와 눈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자고 일어난 아침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 삼십 리 길을 갑니다. 늙으신 몸에 오래 전부터 좋지 않은 무릎관절로 걸음이 불편한 노모는 장을 미리 두 번이나 봐서 어물은 마련해 두었답니다. 막내동생은 과실을, 그 윗동생은 떡을 해오기로 했으니 오늘은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등 육류만 사면 된답니다. 육류 외에도 사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젊은 내가 들고 다니기에도 버거운데 당신 혼자서 어떻게 그 무거운 제수들을 챙길 수 있었을까..

사는 이야기 2010.02.26

대학병원 담장 밑에 핀 봄까치꽃

응급실 의자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담장 밑에 환하게 핀 큰개불알풀 꽃송이들을 발견한다. 열흘이나 지나다니면서도 보지 못했던 꽃인데... 다시 병실을 들러 배낭에 넣어 두었던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서 정성껏 담아 본다.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도 훨씬 작은 이 하늘빛 꽃송이들, 내 지친 심신을 다 헹구어버릴 듯한 맑은 표정... 저 파릇파릇한 기지개, 저 환한 불꽃송이들! 꺼져가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모두 이처럼 깨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짜기의 논과 밭에, 그리고 산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 져 나르던 강철 두 다리는 젓가락처럼 말라 버렸고, 앙상한 두 어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고 있다. 그렇게 누우신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너무도 차분한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를 ..

사는 이야기 2008.02.27

고향의 설날, 봄꽃은 피는데...

차례를 마치고 성묘길에 나선다. 입춘을 지난 날씨는 아름답다. 바람은 향기롭고 햇살은 부드럽다. 양지바른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서 사촌들과 조카들은 모두 함께 엎드려 절을 올린다. 강철 새잎, 질기고 싱싱하여라. 증조할아버지 산소에는 꿩의밥이 파란 잎을 뽐내고 있다. 저 거친 흰털로 칼바람 막으며 모진 겨울을 잘도 이겨내었다. 입춘이 지났는데, 화신(花信)인들 없을까... 그럼 그렇지! 뒷편 언덕을 두리번 거리던 내 눈에 불꽃 같은 양지꽃 한 송이가 들어온다. 물감이 뚝뚝 흐를 듯한 다섯 장의 노란 꽃잎과 묻어날 것만 같은 꽃밥의 색감이 좀 아름다우냐!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동생들에게 맷돌바우에 들렀다 가자고 한다. 3집만 남은 동네 맷돌바우엔 팔순의 집안 어른 두 분이 사신다. 사실 날이 많지..

사는 이야기 2008.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