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소백산 비로봉-국망봉-초암사/ 모시대, 참나물, 말나리, 중나리, 쥐털이슬, 네잎꽃갈퀴

모산재 2012. 9. 23. 22:56

 

고요함 속에서 우주를 비추는 진리의 빛을 적광(寂光)이라 한다. 그 빛은 세속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번뇌를 끊고 절대 정적의 세계로 안내한다. 비로봉은 그 빛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의 응신인 듯 자비로운 모습으로 솟아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에게로 가는 길인 듯 그림처럼 펼쳐진 비로봉 능선길을 아쉽게 돌아보며 국망봉을 향하는 길로 내려선다.

 

 

 

 

국망봉까지는 3km 좀 넘는 거리. 정상적인 산행 걸음이라면 1시간 30분쯤이면 갈 수 있겠지만 풀꽃들 살펴보고 풍경도 즐기며 걷노라니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르는지도 모른다.

 

 

국망봉 가는 능선길 따라 온갖 꽃들이 피어 있다. 

 

 

표범나비 한 마리 큰산꼬리풀에 앉아 꿀을 빨고 있다. 상한 날개에는 퇴색하는 한 계절의 쓸쓸함이 잔뜩 묻어 있다.

 

 

 

한 송이 꽃만 피어 있는 두메고들빼기를 담아 본다.

 

 

 

모시대는 제철. 보랏빛 색감의 꽃이 청초하면서도 유혹적이다.

 

 

 

고산지대에서 만나는 화려한 말나리 꽃.

 

낮은 지대에서 하늘만 바라보는 하늘말나리와는 달리 눈 아래 골짜기만 응시하고 있다.

 

 

 

참나물 꽃도 한창이다.

 

톱니가 날카롭고 건조한 듯한 잎이 큰참나물이지 싶은 참나물도 있고 톱니가 둔하고 잎이 부드러운 그냥 참나물도 함께 어울려 있다.

 

 

 

 

 

 

관목지대를 벗어나 탁 트인 능선길로 나서자, 초지에 핀 한 무리의 중나리 꽃을 만난다.

 

야산에서 만나는 털중나리에 비해 달리 꽃잎의 점무늬가 훨씬 뚜렷하고 줄기나 잎이 매끈하다. 만나기 쉽지 않은 꽃! 

 

 

 

햇볕이 비쳐드는 숲그늘엔 산장대의 어린풀이지 싶은 풀들이 내년을 기약하며 자라나고 있다.

 

 

 

마타리 꽃도 담아 보았다. 그냥 마타리였는지, 돌마타리였는지...

 

 

 

제비쑥은 꽃망울을 잔뜩 달았다.

 

 

 

이곳의 산수국 꽃은 담백하다. 화려무비한 제주산수국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모시대 한번 더...

 

 

 

쥐털이슬 한 무리가 아름드리 활엽수에 기대어서 이슬 같은 잔꽃을 피웠다.

 

 

 

 

습한 바위에 물통이들이 가득하다. 꽃이 필 날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아직은 어려 보인다.

 

 

 

 

국망봉에 가까워질 무렵에 만난 바위봉우리.

 

100mm렌즈로 담으려니 배경 풍경이 잡히지 않아 아쉽다.

 

 

 

 

드디어 눈 앞에 다가선 국망봉.

 

느리게 오르는 능선 저 쪽으로 바위봉우리들이 곳곳에 솟아 있는 풍경이 평화롭다.

 

 

 

높이 1,421m이니 비로봉에 비해 조금 낮다. 봉우리의 동쪽 골짜기는 낙동강이 시작되고 서쪽 골짜기에서는 남한강이 발원한다.

 

영주와 풍기의 선비님들이 이곳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았다 하여 '국망봉(國望峯)'이라 불렀다 한다. 일설에는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가 금강산 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서러벌을 돌아보며 한탄한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좀더 디테일이 있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 중기 배순(裵純)이란 분의 이야기로 전한다. 

 

배순은 국망봉 골짜기 죽계 입구 배점마을의 대장장이였다. 천성이 순박하고 근면하며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소수서원에서 강론할 때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강론을 듣자 퇴계가 그 열정에 감복하여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선조가 승하하자 매월 초하루 보름에 음식을 가지고 뒷산에 올라가 3년 동안 궁궐을 향해 곡을 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마을 뒤의 초암사 뒷산은 배순이 선조를 제사한 곳이라고 해서 국망봉(國望峰 : 나라, 즉 선조를 바라본 봉우리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배순은 이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3년복을 입고 무쇠로 퇴계의 상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그가 죽는 날 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까마귀가 뜰에 무리로 모여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부인이 집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화염 속에 남편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 날 배순은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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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裵純)에 대하여

조선 후기의 문신인 단곡(丹谷) 곽진(郭瑨))은 <단곡문집>에는 배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배순(裵純)은 무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였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풍기로 이사 와서 산지가 30여 년인데, 죽계(竹溪 : 지금의 순흥)의 상류인 평장동(平章洞) 어귀에 가게를 지어 놓고 풀무간일로 업을 삼았다.

 

대장장이란 자들은 그릇이 틈이 있으면 진흙을 바르고 물이 새면 밀랍으로 때워서 자못 거짓으로 꾸며서 이익을 취하는데, 배순은 이와 반대로 기구가 틈이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 틈이 있다 하고는 값을 내렸고, 기구가 물이 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물이 샌다고 말하여 가격을 내렸다고 한다.

 

나는 이로써 그의 정직함을 알았다. 성품이 벌을 치기를 좋아하여 벌이 거의 수십 통이었는데, 일찍이 벌을 죽이지 않으려고 꿀을 다 뜨지 않고 다만 때때로 숟가락을 잡고 뚜껑을 열어 그 맑은 것만 취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로써 순의 청렴함을 알았다. 순이 옛적에 선성(宣城)지방에 살면서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삼년의 복을 하였고 선생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놓고 제사지냈으니, 그 현인을 앙모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선조대왕이 돌아가심에 순이 또한 삼년 상복을 입었고, 복을 마침에 담제(禫祭)를 베풀었으니, 그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아! 순의 선행을 사군자들에게 물어 찾으니 또한 본 사람이 많지 못하였다. 착한 일을 많이 하여도 신분이 비천하여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도다. 범인들의 마음은 하는 바가 있어서 선을 하는 자는 능히 오래 가지 못하니, 혹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고, 혹 어려서는 어질다가도 늙어서는 어기어지고, 심한 자는 하루 이틀 사이에 또한 혹 변하고 바뀌는데, 하물며 삼년이겠으며, 하물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이겠는가?

 

순은 팔십이 다 되어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 마음은 한결 같았으니, 나는 그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세상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나 이름난 벼슬아치들도 그 마음이 누구인들 아름다운 이름을 따내어 일세를 빛내고자 하지 않으랴마는, 그러나 또한 능히 하는 이는 드무니, 곧 그 재주와 식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순이여! 천성적으로 얻어서 마음에 따라 지킨 것을 잃어버리다니 애석하도다. 순이여! 몸은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었도다. 황천이 어둡고 어두우니 누가 어두움을 끼쳤던고?

 

순은 세 아들과 여덟 손자를 두어 심히 번성하니 일찍이 덕을 심은 효험이었던가? 내 감히 대략의 앞뒤를 서술하여 어진 사또에게 드리니 사또의 선을 좋아함이 진실 된 지라 내 생각에 배순은 영영 없어짐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 사또는 창석(蒼石)이었다. 당음(棠陰 : 어진 지방관이 정사를 펴는 곳)에 아뢰어서 다시 조정에 보고하여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이 글을 쓴 곽진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군과 싸우고, 이이첨 주참을 주장하다 자식이 투옥되어 죽자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하고 나선 강직한 선비였다.>

 

 

국망봉을 눈 앞에 두고서 초암사외 배점 마을로 내려서는 등산로로 접어든다. 

 

단풍취가 아주 지천으로 피었다.

 

 

 

며느리밥풀꽃들은 단풍취보다 더 흐드러지게 피었다.

 

 

 

바위 틈에 자라고 있는 고사리에도 눈길을 주고...면마과 우드풀 종류로 보이는데, 확인하니 만주우드풀이라 한다.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

 

젖버섯(굴털이)으로 보이는 버섯에도 눈길 주고...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며 물줄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로 그 지점에 잡초가 우거진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하늘을 지를 듯한 높은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앞에는 '소백산 낙동강 발원지'라고 새긴 표지석이 놓여 있다. 

 

 

 

그냥 그런 자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잡초 우거진 이 평평한 땅은 예전 석륜암(石崙庵)이라는 절이 이있었던 터라 하며 바위는 봉황이 머리를 치켜든 형상이라 하여 봉두암, 또는 봉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수십 년 전까지 석륜암과 몇 암자가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중 공비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산속의 가옥을 청소하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으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00mm렌즈를 갈아끼우기 귀찮아 사진으로 담지 못한 봉바위는 18m나 되는 높이로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면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영험한 바위란다. 그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이 물이 흘러내리며 퇴계가 명명한 '죽계구곡'을 이루고 순흥 땅에 소수서원이 서게 했으며, 안축의 '죽계별곡'을 낳게 했으리라. 

 

<세종실록> '지리지'에 낙동강의 근원을 셋이라 하여,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 소백산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외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 역사적 문헌에 근거하여 작년(2012년) 연말 영주시에서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낙동강 발원지'를 벗어나며 숲속 한쪽 언덕에 서 있는 기이한 탑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면, 그 공터거 석륜암 절터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꽃차례와 잎이 모두 시원스런 노루오줌을 담아 보았다.

 

 

 

 

골짜기로만 내려오는 길, 이미 늦은 오후로 접어든 데다 골이 깊어 숲속 등산로는 어둡다.

 

버스 시간에 맞추느라 바람기 없는 계곡길을 부지런히 걷다보니 땀은 흐르고, 초암사가 아주 멀지 않은 지점에 이르러 맑은 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어지 이리도 산객들이 없이 조용하단 말이냐.

 

아주 짧은 시간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도 날아갈 듯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뿐해진다. 

 

 

초암사 가까워진 곳에서 만난 계곡 옆 동굴.

 

 

 

천연동굴 같지는 않아 광산의 흔적일까 싶은데, 바로 이 죽계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는 석륜광산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찾은 두꺼비.

 

 

 

 

드디어 초암사에 도착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던 중 부석사를 창건하였고 이후에 절을 지어 초암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최근에 불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 단정하면서도 화려하다.

 

 

퇴계선생이 죽계구곡이라 명명하고 그 이전 고려 때 안축이 '죽계별곡'이란 이름으로 노래한 계곡은 초암사 아래 쪽에 자리잡고 있다.

 

 

 

해가 저무는 계곡에 한참 때늦은 함박꽃이 피어 있어 눈길을 끈다.

 

 

 

 

죽계구곡 주변은 온통 사과 과수원.

 

아름다운 계곡은 과수원 안에 숨어 있고, 사과밭 곳곳에서 도난방지용 라디오 방송과 녹음기 테이프에서 재생되는 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린다. 

 

 

배점마을 주차장 가까워진 길에서 네잎갈퀴나물(네잎꽃갈퀴)을 만나고  소백산 산행은 마무리되었다.

 

 

 

 

해는 넘어가고 어둠이 슬슬 밀려오는 시간,

배점마을 너른 주차장 입구에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자 순흥 가는 시내버스 막차가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