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전기 분청사기, 국보와 보물들

모산재 2012. 3. 10. 11:46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화려하고 귀족적인 고려 청자는 점차로 사라지고 대신 소박하고 서민적인 분청사기가 들어서게 됩니다. 청자에 비해 색상도 밝지 않고 모양도 투박하지만 친근한 느낌이 드는 분청사기가 대세로 자리잡게 됩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도공들이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요지를 만드는데, 고려 말 20여 개소에 불과했던 요지가 200여 개소에 이를 정도로 확산됩니다. 이에 따라 고려청자와는 다른 지역적 특성을 가진 독특한  분청사기가 생산되는데 임진왜란까지 지배적인 도자 양식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조선 초에는 많은 관공서와 왕실에서도 백자와 함께 분청사기를 사용하였습니다. 도자의 발달단계로 보면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의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44)이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붙인 명칭입니다. 청자에 비하여 입자질이 많고 푸른 빛이 도는 그릇이므로 분청사기라고 하였습니다.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분청사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자유분방하고 활달하며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을 보입니다.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판 후 백토를 넣어서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기법, 무늬를 도장으로 찍고 백토분장을 한 후에 닦아내서 무늬가 나타나개 하는 인화기법(印畵技法), 흙물을 바르고 무늬만 남기고 바탕은 파내는 박지기법(剝地技法), 분장 후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기법(造花技法), 분장 후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기법, 귀얄로 분장만 하는 귀얄기법, 백토물에 담궈서 분장하는 덤벙기법 등이 그 대표적이 기법입니다.

 

15세기 초까지는 고려청자 상감무늬의 흔적을 보이며 인화기법이 등장하고 15세기 후반에는 상감 ·인화 ·조화 ·박지 등 다양한 기법의 분청사기가 생산되며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기에는 상감 ·인화 기법은 쇠퇴하고 철화 ·귀얄 ·덤벙분청이 성행하게 됩니다. 16세기 후반에는 귀얄 ·덤벙분청이 소멸됩니다.

 

 

 

 

● 분청사기 상감 물고기무늬 매병 / 보물 제 347호, 15세기

 

 

조선 전기에 제작된 청자 매병으로 분청사기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여말선초의 일반적인 매병의 형태이다. 그릇 모양은 상감청자에 가깝지만 무늬를 표현하는데 인화기법의 비중이 높아졌고 탁했던 유약이 비교적 맑은 회청색으로 바뀐 점이 두드러진다.

 

 

 

출처 : 문화재청

 

 

 

 

높이 30.0㎝, 아가리 지름 4.6㎝, 밑지름10.4㎝이다. 아가리가 도톰하여 청자 전성기 때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양이 복잡하고 구슬무늬와 변형된 구름, 연꽃무늬 등 분청사기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 사용되었다.

 

몸통의 4면에는 구슬무늬와 2겹으로 동심원을 그렸고, 그 안에 2마리의 물고기를 각각 흑백상감하고 물결을 흑상감으로 처리했다. 동심원 밖으로는 점을 가득 찍어 채웠다. 위쪽으로 4곳에는 흑백상감으로 나는 학을, 허리 부위에는 꽃과 풀을 추상화하고, 그 아래 연꽃을 그렸다.

 

병 아가리 둘레에는 흑백상감으로 꽃잎을 간략하게 표현했고, 그 아래에는 덩굴로 띠를 둘렀다. 담청색을 띤 청자 유액에 가까운 유약을 사용하여 유약에서도 과도기적 모습을 볼 수 있다.

 

 

 

 

● 분청사기 풀무늬 항아리와 인화무늬(印花紋) 항아리 / 미지정문화재, 15세기 초

 

 

세종의 총애를 받다가 열세 살의 나이로 죽은 세종의 장녀 정소공주의 묘에서 나왔다. (원래 정소공주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면서 함께 묻혔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내항아리와 외항아리가 함께 출토되었는데, 두 항아리는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이 대조적인데, 이런 차이점은 상감청자에서 인화기법 분청사기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태 항아리 모양이어서 공주가 태어난 1412년에서 사망한 142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의 초창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3점의 분청사기 네 귀 달린 항아리가 나왔는데, 풀꽃 무늬를 간소하게 상감해 표현한 '분청사기 풀꽃 무늬 항아리(粉靑沙器 象嵌 草花文 四耳壺)'와 4줄의 연속된 작은 원 무늬를 도장으로 촘촘하게 인화 장식한 '분청사기 인화 무늬 항아리(粉靑沙器 印花文 四耳壺)' 2점이 잘 알려져 있다. 높이는 각각 21,2cm, 19.1cm.

 

풀꽃 무늬 항아리는 고려 말 상감청자의 여운이 다소 남아 있지만 상감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시대의 새로운 상감 무늬로 꾸며졌다. 이와 함께 어깨 부분과 풀꽃 무늬 사이에 인화 장식된 국화 무늬가 어우러져 조선화된 상감 분청사기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다.

 

인화 무늬 항아리는 인화 분청사기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데, 작은 원이 집단으로 이뤄진 인화 무늬를 몸체 중심에 밀집해 장식하면서도 아랫부분의 변형된 연판문은 상감 기법으로 처리해 고려의 상감청자에서 조선의 분청사기로 정착해 가는 단계를 시사한다.

 

 

 

 

● 분청사기 상감 모란무늬 편병 / 미지정문화재, 15세기

 

분청사기에서 나타나는 상감기법은 초기에는 단순히 선을 표현하다가 점차 문양 전체면(面)을 상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북 부안군 우동리 가마에서 이 병과 동일한 특징을 가진 도자기 파편이 출토된 바 있다.

 

 

 

 

 

높이 17.4cm. 납작한 앞뒷면에는 화려한 모란 꽃잎과 줄기가 면상감(面象嵌)으로 큼직하게 장식되어 있다.

 

 

 

 

● 분청사기 박지철채 모란무늬 자라병 / 국보 제260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병으로 야외에서 술, 물을 담을 때 사용하던 용기이다. 무늬가 새겨진 곳 이외의 백토면을 깎아낸 후, 검은 색 안료를 칠하여 흑백의 대조가 대비되게 박지기법으로 새겼다. 박지기법으로 분청사기 특유의 대범하고 활달한 분위기가 잘 나타난 작품으로 분청사기 무늬 중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나다.

 

 

 

 

 

크기는 높이 9.4㎝, 지름 24.1㎝이다.

병 전체를 백토로 두껍게 바르고, 윗면에는 모란꽃과 잎을 간략하게 나타냈다. 박지모란무늬의 구성이 대담하고 활발할 뿐만 아니라 무늬와 바탕면과의 대조를 선명하게 하기 위하여 바탕면에 검은 색 안료를 입혔다. 병의 밑면에도 모란을 선으로 새겨 장식하고 있다. 굽은 낮고 바닥 가장자리에 덩굴무늬 띠를 돌렸으며, 유약의 색은 회청색으로 광택이 있으나 바닥의 일부는 산화되어 변색되어 있다.

 

 

 

 

● 분청사기 구름 용무늬 항아리 / 국보 제259호, 15세기 전기

 

 

흑백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을 사용하여 운룡문과 여의두문을 새겼다. 항아리의 당당함과 14~15세기에 유행하였던 여의두문, 당초문, 용문과 장식적인 연판문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1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높이 49.7㎝, 입지름 15㎝, 밑지름 21.2㎝.

 

아가리가 밖으로 살짝 말리고 어깨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서서히 좁아진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릇의 벽이 두껍고 묵직하다.

도장을 찍 듯 반복해서 무늬를 새긴 인화기법과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목 둘레를 국화무늬로 새겼으며, 몸통에는 세군데에 덩굴무늬 띠를 둘러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위쪽 부분은 다시 꽃무늬 모양의 굵은 선을 둘러 구획을 나누고 위, 아래로 국화무늬와 파도무늬를 꽉 차게 찍어 놓았다. 몸통 가운데에는 네발 달린 용과 구름을 활달하게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쪽은 연꽃 무늬를 두르고 있다.

 

 

 

 

● 분청사기 음각 물고기무늬 편병 / 국보 제 178호, 15세기

 

 

배 부분이 앞·뒤 양면으로 납작하고 편평한 조선 전기 분청사기 편병이다. 백토을 두껍게 입히고 조화수법으로 물고기무늬를 그린 위에 연한 청색의 투명한 유약을 칠하였다.

 

 

 

 

 

 

크기는 높이 22.6㎝, 입지름 4.5㎝, 밑지름 8.7㎝이다.앞·뒷면과 옆면에 서로 다른 무늬와 위로 향한 두 마리의 물고기를 생동감이 넘치는 선으로 나타냈다. 양 옆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위와 중간에 4엽 모란무늬을 새기고, 배경을 긁어냈으며 아랫부분에는 파초를 넣었다.

 

바탕흙은 회청색으로 백토분장이 된 곳과 분장이 안 된 곳과의 대조가 선명하다.

 

 

 

 

 

분청사기는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백자에 밀려 점차 소멸하여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를 공급하게 되고, 중앙관요의 영향으로 지방에서도 백자 생산이 증가하면서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백자가 급속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흰색을 좋아하고 어두운 색의 분청사기보다 흰색의 백자가 식기로서 더 선호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