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시대 건너 가기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에게 보낸 편지(청와대 기록 유출 관련)

모산재 2009. 6. 1. 15:11

 

작년 여름,

 

국가기록원 청와대 기록 사본을 봉하마을 사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을 불법 유출이라며

권력과 언론을 동원해 노무현 대통령을 대대적으로 압박한 사건이 있었다.

 

기록을 중시하던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기록물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재임 기간에 국가기록물법을 만들고 국가기록원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전임 대통령들은 자신들 재임시 청와대 기록들을 파기하거나 개인적으로 가져갔는데

그 자료들을 남겨 두었다가 후임자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노대통령이 반납한 국가기록원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국가기록물은 대통령 퇴임 후 30년이 지나야 공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어떤 대통령이 자신의 기록물을 솔직하게 남겨 두겠는가.

 

역사 기록을 소중하게 남기고자 했던 노대통령의 선의는 퇴임 6개월만에

이명박정권에 의해 언제든지 악용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 폐단을 없애고자 만든 국가기록원이 아직 열람을 위한 전산망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아

퇴임 후 먼 시골에 살게 된 전직 대통령이 열람의 편의를 위해 원본도 아니고 사본을 두고 보겠다는 것을

(자신의 재임기간의 기록물을 열람하는 것은 기록물법에 보장된 권리이다.)

이명박 정권은 권력을 동원해 불법 고발 운운하며 노대통령 주변인물들을 압박하고 

이에 맞춰 조중동 언론은 노대통령을 국가기밀을 빼돌린 '네다바이'범으로 몰아갔다.

 

어찌 보면 검찰이 박연차를 '족쳐' 그 1인의 진술에 의지해 노대통령의 가족, 일가친척, 참모들을 싹쓸이하는 한편

언론에는 확실한 증거도 없는 피의사실을 매일처럼 흘리며 노대통령을 천하 잡범으로 몰아가면서

끝도 없이 시간을 질질 끌며 마침내 죽음으로 몰아 넣은 이즈음의 참담한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명박에게 쓴 항복에 가까울 정도의 다음 편지글에는

당시 노대통령이 느꼈을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이 절절이 배어난다.

  

어찌보면 노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미 이 때부터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전임 대통령이 이명박 후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기록 사본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사리를 가지고 다투어 보고 싶었습니다. 법리를 가지고 다투어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람권을 보장 받기 위하여 협상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티었습니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 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내가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내가 잘 모시겠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만큼, 지금의 궁색한 내 처지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가다듬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가지러 오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기록관장과 상의할 일이나 그 사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국가기록원장은 스스로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 것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해 놓은 말도 뒤집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상의 드리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기록을 보고 싶을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천리길을 달려 국가기록원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 맞는 열람의 방법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직 대통령 문화에 맞는 방법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적절한 서비스가 될 때까지 기록 사본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맞습니까? 지금 대통령 기록관에는 서비스 준비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언제 쯤 서비스가 될 것인지 한 번 확인해 보셨습니까? 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나의 국정 기록을 내가 보는 것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 것입니까? 

 

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 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상소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에 달려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는 글들은 읽고 계신지요?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섭니다. 하느님께서 큰 지혜를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7월 16일

16대 대통령 노무현

 

 

▶ 이 편지글 끝에는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며 전직대통령인 자신과 "정치게임이나 하고" 있는 이명박에 대한 충고를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노대통령의 말대로 "정치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에도  이명박은 정치게임이나 하고 있었고, 결국 그로부터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그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그토록 목메도록 외치던 "잃어버린 10년"을 불과 집권 반 년만에 초과 달성하며 전국민을 IMF보다 더 큰 고통의 나락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