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이야기 168

겨울에 꽃을 피운 제주도 번행초(Tetragonia tetragonoides)

제주도 애월 해안산책로 주변 길섶에는 따스한 볕을 받은 번행초가 벌써 꽃을 피웠다. 주로 5월에 핀다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볼 수 있는 것이 번행초다. 그럼에도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는 곳은 제주도밖에 없으리라. 번행초는 우리 나라 중부 이남, 태평양 지역 따뜻한 바닷가 모래땅에 두루 자생하는 여러해살이 다육식물이다. 생명력이 강하여 자갈밭이나 바위틈 등 몹시 척박하고 물기가 없는 곳에서도 잘 자란다. 얼핏 보면 잎모양이 시금치를 닮았는데, 영어 이름도 '뉴질랜드 시금치(New Zealand spinach)'이다. 쿠크선장이 뉴질랜드에서 자생하는 것을 가져가 소개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줄기는 기듯이 자라는데 가지를 많이 쳐 종종 한 아름이 되는 것도 있다. 줄기와 잎이 다육질이어서 잘 부러지고 꺾..

제주도 두모악에서 만난 겨울 수선화

눈속에 피는 꽃이 설중매뿐인 줄 알았더니 설중화(雪中花)도 있었다. 몇 년 전 제주도에서 차창으로만 안타까이 바라보았던 설중화, 눈 속에 핀 수선을 그리던 님 만나듯 마주친다. 애월의 해안 산책로에서 화심이 오글오글한 제주도 자생 수선화를 눈맞춤하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쓸쓸한 뜰에서 금잔옥대 꽃덤불에 묻힌다. 금잔옥대(金盞玉臺)는 하얀 꽃잎 속에 황금 잔 모양의 화심을 가진 단아한 수선화다. ↓ 제주도 자생 수선화 ↓ 김영갑 갤러리 뜰에 핀 수선화,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가 '청수진간해탈선(淸水眞看解脫仙)'이라 표현했던 꽃,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물에 빠져죽은 저 지중해의 미소년이 동양에 와서는 '물에 사는 신선(水仙)'이 된 것일까. 살..

여름밤의 향기, 야래향(夜來香) Cestrum nocturnum

야래향(夜來香)은 가지과의 늘푸른 소관목이다. 영어 이름은 '밤에 피는 재스민(Night Blooming Jassamine)', 이름처럼 밤에 꽃을 피우며 짙은 재스민 향기를 뿜어내며 여름밤 낭만을 더해 주는 꽃이다. '밤에 피는 향기'를 뜻하는 '야래향(夜來香)'이란 이름에서도, 학명 Cestrum nocturnum에서 보듯 종명이 쇼팽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낭만파 시대의 피아노 소곡, 밤의 분위기에 영감을 받아 창작된 '야상곡(夜想曲)' '녹턴(nocturn)'에서 유래한 것에서도 야래향이 얼마나 낭만적인 꽃으로 인식되었는지 알 수 있다. ↓ 가락동 아파트 화단 낮에는 꽃이 닫혀서 향기가 없다가, 밤이면 활짝 피어서 재스민과 같은 강한 향기를 내뿜는다. 창 밖에 심어두면 그 향기에 취하여 밤잠을 못 ..

고구마꽃, 고구마 이야기

어린 시절, 우리 집 밭이란 밭은 온통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를 심기 위해서는 고구마 뿌리를 고운 퇴비로 만든 흙속에 묻어서 고구마순을 길러야 했다. 비닐하우스라는 게 없던 시절 추위에 약한 고구마순을 길러내기 위해서 따뜻한 방 안 윗목에 묘판을 만들었다. 비가 내리는 늦은 봄, 어머니는 한 자 이상 자라난 고구마 줄기를 가위로 잘라내 반 뼘 정도의 길이로 고르게 자른 다음 밭으로 내다가 익어가는 보리 이랑 사이에 심었다. 보리와 고구마의 이모작인 셈이다. 늦가을, 온 식구가 밭에 나가 고구마를 캔다. 좁은 방안에 갈무리된 열 가마도 넘는 고구마는 겨우내내 우리 식구의 점심이 되었다. 지겹도록 먹은 동치미와 김치와 고구마! 몇 년 전, 아파트 단지 주변의 고구마 밭을 지나다 문득 고구마꽃을 보고 싶다는..

쇠무릎과 털쇠무릎, 쇠무릎에는 풀빛 꽃이 핀다

쇠무릎은 비름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산과 들은 물론, 도시의 길거리, 아파트 정원의 한 구석 어디에든 쉽게 만날 수 있는 생명력 강한 흔한 잡초이다. 줄기가 자라면서 마디가 불룩하게 자라난 것이 마치 소(牛)의 무릎(膝)처럼 보여 '쇠무릎'이라고 하는데 한방명인 '우슬(牛膝)'도 같은 뜻이다. 가을이면 잎겨드랑이와 줄기 끝에서 꽃이삭이 올라오지만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하고 관찰하는 사람들은 드문 듯하다. 꽃을 기대하고 기다리는데 꽃은 보이지 않고 어느 사이 송곳 모양의 열매만 잔뜩 달려 있다. 쇠무릎은 꽃이 없거나 폐쇄화가 아닐까, 싶은데 사실 열매라고 생각하는 그 뾰족한 것이 꽃봉오리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꽃싸개)이 다섯 갈래로 살짝 벌어지면서 다섯 개의 수술과 한 개의 암술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

당매자나무와 일본매자나무, 어떻게 다를까

당매자나무(Berberis poiretii)와 일본매자나무(Berberis thunbergii)는 어떻게 다른 걸까? 이를 제대로 구별하는 이가 없는 것 같다. 인터넷에는 단순히 잎이 푸르면 당매자나무, 잎이 붉으면 일본매자나무라는 엉터리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다. 수목원이나 공원 등에서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두 이름표가 달려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있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당매자나무에 대한 기재문은 있어도 일본매자나무에 대한 기재문이 아예 비어 있다. 나무 전문가들도 혼동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무 박사이신 박상진 교수조차도 이 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매자나무속에는 원예품종이 많으며 일본매자나무는 또 자주잎일본매자 등 품종이 있습니다. 당매자와 일본매자는 비슷한 수종으로..

잎이 뿌리를 대신하는 생이가래 Salvinia natans

물 위에 떠 있는 생이가래를 보고, "아, 생이가래는 두 개의 잎이 마주나는 녀석이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생이가래는 3개의 잎이 마디에 돌려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보통의 식물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2개의 정상적인 잎은 물 위에 떠 있어 부수엽(浮水葉)이라 부르는데 이는 여느 식물의 잎처럼 광합성을 담당한다. 반면 나머지 하나의 잎은 물 속에 잠겨 있어서 침수엽(沈水葉)이라 부르며, 수염뿌리 모양으로 가늘게 갈라져서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는 뿌리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잔털이 질서 정연하게 나 있는 잎이 바로 부수엽이다. 깔끔한 용모로 마주난 듯 보이는 두 장의 잎 아래에는 다르게 생긴 또 하나의 잎을 물 속으로 드리우고 있다. 물속으로 드리우고 있는 또 하나의 잎(침수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