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이야기

제주도 두모악에서 만난 겨울 수선화

모산재 2010. 3. 1. 20:29

 

눈속에 피는 꽃이 설중매뿐인 줄 알았더니 설중화(雪中花)도 있었다. 몇 년 전 제주도에서 차창으로만 안타까이 바라보았던 설중화, 눈 속에 핀 수선을 그리던 님 만나듯 마주친다.

 

애월의 해안 산책로에서 화심이 오글오글한 제주도 자생 수선화를 눈맞춤하고,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의 쓸쓸한 뜰에서 금잔옥대 꽃덤불에 묻힌다. 금잔옥대(金盞玉臺)는 하얀 꽃잎 속에 황금 잔 모양의 화심을 가진 단아한 수선화다.

 

 

 

 

↓ 제주도 자생 수선화

 

 

 

 

 

↓ 김영갑 갤러리 뜰에 핀 수선화,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가 '청수진간해탈선(淸水眞看解脫仙)'이라 표현했던 꽃,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물에 빠져죽은 저 지중해의 미소년이 동양에 와서는 '물에 사는 신선(水仙)'이 된 것일까. 살짝 습한 땅에서 날렵한 잎과 꽃대를 올리고 눈발 날리는 하늘 아래 세상의 어떤 생명보다 빠르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윽한 향기를 세상에 전한다.

 

 

一點冬心朶朶圓   한 점 겨울 마음 늘어진 송이마다 동글동글 달렸고
品於幽澹冷雋邊   그윽하고 담담한 품성 시리도록 빼어난 모습이네.
梅高猶未離庭砌   매화가 고상하다 하나 뜰의 섬돌을 떠나지 못하건만 
淸水眞看解脫仙   맑은 물에서 진실로 보나니, 해탈한 신선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선화는 그 맑은 품성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킨 꽃이다. '자아도취, 자만, 자애, 고결, 무심' 이 모든 것들이 수선화를 일컫는 꽃말들이다. 세상이야 눈보라 매서운 겨울일지언정 오불관언이다. 추사가 난초 못지 않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추사가 살던 그 시절에도 이미 제주도 전역에 수선화가 흔해서 '정월 그믐 이월 초에 피'는 꽃이 삼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이 흰구름이 질펀하게 깔린 듯, 白雪이 드넓게 쌓인 듯' 했다고 한다.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하고,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 것을 추사는 몹시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던 추사는 마침내 수선을 방 안에까지 모시지 않았던가...

 

 

碧海靑天一解顔     푸른 바다 푸른 하늘 해탈한 듯 맑은 얼굴
仙緣到底未終慳     신선의 태 도저하여 끝내 감출 수 없나니
鋤頭棄擲尋常物     호밋머리 내던져진 심상한 이 물건을
供養窓明几淨間     밝은 창 정갈한 책상 그 사이에 공양하네

 

 

 

 

 

 

 

 

서역을 넘어 저 사막의 땅 이슬람 세상에서도 수선화는 물욕의 저편으로 이끄는 정신세계를 상징했던 모양이다.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는 " 조각의 빵이 있는 자는 그 한 조각을 수선화와 맞바꿔라. 빵은 몸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하다." 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수선화의 맑은 풍모는 대중가요에서도 널리 노래되었다. 가수 양희은이 번안하여 불렀던 '일곱송이 수선화(Seven Daffodiles)', 가사를 외지 못해 중간중간 끊기기도 하지만 가끔씩 흥얼거리기도 했던 원곡의 아름다운 노랫말.

 

 

I may not have a mansion I haven't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 to crinkle in my hand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I do not have a fortune to buy you pretty things
But I can weave you moon beams for necklaces and rings

(내 손에 움켜쥘 지폐 한 장도 없고요. 그러나 천 개의 언덕 위에 열리는 아침을 보여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게 키스하고 일곱 송이의 수선화를 드릴 수 있어요. 나는 당신께 예쁜 것들을 사 줄 재산도 없어요. 그러나 달빛으로 목걸이와 반지를 짜 드릴 수 있어요.)   <하략>

 

 

 

 

 

 

 

 

 

정호승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하였지. 이어지는 "눈이 내리면 눈길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라는 그의 말 그대로 눈비 섞어치는 길을 걸어서 '수선화에게'로 왔다.

 

 

 

길가에 핀 수선화를 본 신 선생님은 내내 김동진 곡의 '수선화'를 불러댄다. 가곡의 선율에 그리 어울리지 못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려운 선율에 걸려 노랫말의 아름다움까지 넘어진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그리다가 죽고, 죽었다가 살아 또 죽는 '가여운 넋', 그것이 수선화 꽃이다. 두모악 옛 초등학교 터에 재로 뿌려진 김영갑의 얼굴이다. 눈보라도 마다 하지 않고 그의 흔적을 기어이 찾아가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지... 

 

 

 

 

 

 

 

 

 

 

 

● 수선화 水仙花 Narcissus tazetta var. chinensis  | daffodil, narcissus   ↘   백합목 수선화과 수선화속의 여러해살이풀

비늘줄기는 넓은 달걀 모양이며 껍질은 검은색이다. 잎은 늦가을에 자라기 시작하고 줄 모양이며 길이 20∼40cm, 나비 8∼15mm로서 끝이 둔하고 녹색빛을 띤 흰색이다. 알뿌리는 비늘줄기로 둘레가 8cm인 소형에서 20cm에 이르는 대형인 것까지 있다. 줄기는 품종에 따라 10~50cm로 크기에 차이가 있다.

꽃은 12∼3월에 꽃줄기 끝에 홀로 또는 산형꽃차례로 피며 지름 1.5cm 정도의 소륜에서 12cm에 이르는 대륜까지 있다. 통부(筒部)는 길이 18∼20mm, 꽃자루는 높이 20∼40cm이다. 포는 막질이며 꽃봉오리를 감싸고 꽃자루 끝에 5∼6개의 꽃이 옆을 향하여 핀다. 화피갈래조각은 6개이고 흰색이며, 부화관은 높이 4mm 정도로서 노란색이다. 6개의 수술은 부화관 밑에 달리고, 암술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비늘줄기로 번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