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섬 여행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 보길도 여행

모산재 2005. 12. 22. 15:17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

2005. 1. 19 ~ 20

 

 

 

 

윤선도가 보길도에 온 것은 그의 나이 51세 되던 인조 15년(1637), 그가 이 섬을 찾아온 내력은 이렇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태종이 직접 전쟁에 나섰고, 청의 군사는 급속히 서울로 진격해 왔다. 사태가 급해지자 왕은 세자빈과 원손,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결국 이듬해 1월 30일 한강 동쪽의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해남 집에 있던 윤선도는 난리 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을 돕기 위해 집안 사람들과 노복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는데, 도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뒤이어 왕이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바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인이 권세를 잡고 있던 시절에 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미 유배와 좌천, 파직을 당하는 등 사람들 속에서 피로했던 윤선도는 이 치욕적인 소식을 듣자 다시는 세상 꼴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윤선도 일행은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보았고, 섬에 올라 산수를 둘러보고 반한 윤선도는 제주도까지 갈 것 없이 그 섬에 터를 잡아 버렸다.

 

 

그 섬이 바로 보길도이다.

 

윤선도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보길도 전체를 정원으로 삼은 윤선도의 풍류는 물론 해남윤씨 집안의 엄청난 경제력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후 윤선도는 두 차례 더 귀양을 가고 벼슬살이를 하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를 드나들며 섬 이곳 저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하여 자신의 낙원,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 세연정(洗然亭)

 

 

'씻은 듯 깨끗하고 개운하다'는 뜻을 가진 세연정은 윤선도 풍류의 절정을 보여 주는 공간이다. 1637년 병자호란 이듬해에 이곳을 찾은 윤선도가 지은 정자이다.

 

'문화원형 용어사전'에는 세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지은 정자로 날이 좋은 날이면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와 술을 한 잔 걸치고서는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했던 곳이다.

 

 

'윤선도의 어느 후손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유사(家藏遺事)>에도 윤선도의 보길도 생활을 나타내는 좀더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술과 안주를 충분히 싣고 고산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게 하면서 찬란한 빛깔의 옷과 어여쁜 얼굴이 물위에 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공들을 불러 올려 풍악을 울리게 했다.

 

 

원래 있던 세연정은 낡아서 무너졌고 지금의 정자는 1993년에 옛 주춧돌 위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세연정 내부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 윤선도는 독서를 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오후가 되면 가마에 술과 음식을 담아 무희와 함께 세연정으로 향했다. 악공들의 연주 소리에 인공의 연못 사이로 작은 배를 띄워 무희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과 음식을 즐겼다.

 

 

윤선도의 5대손 윤위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의 기록을 보자.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 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바위가 '옥소암'이고 , 또 어느 바위가 '칠암'인지... 신선이나 즐길 수 있을까 싶은 풍류를 윤선도는 즐기며 살았다. 참으로 대단한 호사가 아닐 수 없다.

 

 

 

 

● 동천석실(同天石室)

 

 

신선의 놀이터랄까! 동천석실은 부용동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전망이 트인 경치가 아름답다. 윤선도는 이곳을 "부용동(芙蓉洞) 제일의 절승(絶勝)" 이라 하여 정자를 짓고 부용동 전경을 바라보면서 시가를 읊었다 한다.

 

정자 주변에는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였는데,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 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남아있다.

 

 

 

 

 

 

용두암. 동천석실앞 사람들이 앉아 있는 바위, 도르래를 이용해 낙서재와 연락하던 곳이란다. 

 

 

 

 

수련을 심었다는 석담 바위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 낙서재(樂書齋) 터

 

 

보길도 주봉인 격자봉(425m) 밑에 지은 낙서재는 1670년 윤선도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거처였다. 낙서재 주변에는 동와 · 서와라는 작은 집이 있었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손님을 맞이하는 무민당(無悶堂)이라는 집을 두었다.

 

지금은 복원을 위한 발굴 공사 중이다.

 

 

 

 

 

 

 

세연정이 풍류의 공간이었다면 낙서재는 강학과 은둔의 생활공간이다.낙서재 자리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윤선도는 낙서재터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소은병(小隱屛)'이라 불렀는데, 이는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의 봉우리 이름을 딴 것으로 주자의 행적을 따르고자 했던 윤선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낙서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곡수당(曲水堂) 터가 있는데, 고산의 아들 학관이 기거했던 서재로 전해진다. 

 

 

 

 

윤선도 유적지를 돌아본 다음 일몰을 보기 위해 뾰죽산 부근 망끝 전망대로 향했다.

 

 

망끝 전망대는 섬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여기서 도로는 더 진행하지 못한다. 뾰죽산 아래 마을에는 어민들이 잡은 어패류로 담은 젓갈 항아리들로 가득 차 있다.

 

 

 

 

절개지 앞쪽이 망끝 전망대가 있는 곳이다.

 

 

 

 

 

 

 

 

 

망끝 전망대의 일몰

 

 

 

 

 

 

 

 

어둠이 깃드는 중리해변

 

 

 

 

 

 

다음날 아침, 예송리해변의 일출

 

 

 

 

 

 

완도 행 배에서 돌아본 보길도

 

 

 

 

 

보길도 건너편으로 보이는 노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