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6)

모산재 2007. 4. 5. 14:05

 

1~8회에 걸쳐 연속해서 싣는 이 글은 굴렁쇠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125645에서 퍼 온 것입니다. 4.3의 아픈 진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합니다.

 


▲ 다랑쉬굴의 슬픈 역사를 알고 있을까.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를 지켰던 팽나무와 다랑쉬오름.

 

 

제주 4·3 대량학살을 이끈 '초토화 작전'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어진 '초토화작전' 때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다. 제주섬은 그야말로 불바다가 됐다. 불의 섬이 화산폭발 때 말고도 또 있었을까. 초토화작전은 반인륜적 범죄로 국제법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법이었다. 11월 중순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자들이 희생됐지만 이 때부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토벌대는 무고한 양민을 향해 '빨갱이 사냥'을 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이 때에 희생됐다. 제주도에 불법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이 시기다.

강경진압작전은 중산간마을에 대한 방화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하는 형태로 벌어졌다. 이 시기에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의 교전은 흔치 않았다. 저항할 힘조차 없이 두려움에 떠는 제주 섬주민들이 주로 희생됐다. 이 작전의 총대는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맡았다. 그는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구실아래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고 모두 불태워 버릴 것을 지시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한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이다.

당초 진압군의 작전 개념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疎開)시키고, 해변마을에서는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 소개령은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전제 아래,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후 '보갑제'라는 연대책임식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해 일반 주민과 무장대를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산간 벽지에 있는 사람이 해안지대로 내려오지 못했거나 숨어 지내게 되면 모두 빨갱이 신세가 됐다.

그러나 진압군은 이것마저 지키지 않았다. 곳곳의 중산간마을에서 소개령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마을을 덮쳐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총살해 버렸다. 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졌다면 '입산자 가족',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1948년 12월 중순께 이르러서는 작전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군 G-2보고서에 의하면, 대전의 2연대와 교대키로 된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앞서 '훌륭한 토벌업적을 세우려는 욕망'에 의해 과잉진압 성격의 군사작전을 전개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대살(代殺)' '자수사건' '함정토벌', 그리고 산중에 은신한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하는 등 '전과'에 열을 올리면서 제주도민의 희생은 더욱 컸다.

미국무성 관리인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서도 "학살극이 절정에 달했던 12월 중순께는 무고한 양민 630명이 단 1주일 동안에 살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랑쉬굴 양민집단학살 사례

 

 

▲ 이 팽나무 아래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제주 옛마을의 한복판에는
수백년된 팽나무가 있었다.

 

이번에 다루는 사례는 바로 이 '초토화 작전' 시기에 발생한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이다. 이 학살사례만큼 제주4·3민중항쟁의 총체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도 드물다. 학살의 광풍을 피해 오직 실날같은 생존에 운명을 건 섬주민들의 입산과 참혹한 죽음, 44년 동안 방치된 시신, 국가와 지방정부에 의해 불태워져 바다에 뿌려진 수장, 학살현장 봉쇄로 이어진 일련의 역사에서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끝나지 않았고, 제주 4·3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랑쉬굴은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동굴이다. 아름다운 능선이 하늘로 이어지다가 정상에는 세상을 삼킬 듯이 입을 벌린 굼부리를 간직한 다랑쉬오름 아래 속칭 '선수머세'라 불리는 곳에 있다. 4·3민중항쟁 이전까지는 이 오름 자락에는 마을이 있었다.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목축과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던 산촌이었다. 1948년 겨울 어느날,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타버리고, 지금은 수백년을 지켜온 팽나무와 집터마다 대나무숲만이 무성하게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를 지키고 있다.

1948년 12월 18일(음력 11월 18일) 다랑쉬굴에 대한 토벌작전은 함덕 주둔의 제9연대 제2대대의 지휘아래 군·경·민 합동으로 이루어졌다.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비무장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져 마을의 젊은 남자들의 신변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특히 소개민과 마을의 젊은 사람들에 대한 심사가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억울한 희생이 나타났다. 이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들과 산으로 임시 피신하거나 아니면 마을에 남아 있다가 요행히 경찰의 눈을 피해 살아남는 방법 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는 개인감정에 의한 거짓 밀고로 죽어간 사람들도 대다수 나타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무장대가 습격하면 그 책임을 민보단이나 가족, 친척에게 전가해 '대살'하는 행위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 1948년 겨울, 다랑쉬굴의 4·3희생자 유골을 직접 수습했다는 채정옥씨가 당시 학살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종달리 청년들이 피신하던 날은 48년 11월 18일이었다. 이날 종달리에서는 이 마을 김호준과 채정옥이 무장대에 의해 납치됐다. 이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덮어 씌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결국 이들은 자진해서 피신하게 된 것이다. 항쟁 발발초기에 입산하지 않고 이 시기에 산으로 피신한 것은 적어도 생존을 위한 피신의 경우다. 피신한 후 납치됐던 채정옥과 이들 청년들은 다랑쉬굴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 채정옥씨는 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됐고, 만약 마을에 있으면 자신도 도피자로 몰려 처형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종달리 및 하도리 주민 20여명이 숨어 지내는 다랑쉬굴에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친 날은 1948년 12월 18일. 당시 민보단 간부로 토벌작전에 따라 나섰던 오지봉씨(증언 당시 75세·구좌읍 종달리)는 이렇게 증언했다.


"군·경·민 합동 토벌대가 빗질하듯 다랑쉬오름을 포위하며 수색하였다가 굴을 발견했지. 굴밖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사살됐어. 굴 입구가 양쪽에 두 개였는데, 나오라! 나오라! 소리쳤는데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토벌대가 처음에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어.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어."(1992년 4월 3일 제민일보 증언 보도)



이날 10평 남짓한 좁은 굴 속에 있다가 11명이 질식해 숨졌다. 희생자 가운데는 아홉살난 어린이도 있었다. 사망자 11명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 출신의 강태룡(34) 박봉관(27) 고순환(27) 고순경(25) 고태원(25) 고두만(21) 함명입(21)과 하도리 출신인 김진생(51) 부성만(24) 이성란(24) 이성란의 아들 이재수(9) 등 남자 8명, 여자 3명이었다.

다랑쉬 굴에 있다가 다른 굴로 피신하는 바람에 참변을 모면했던 채정옥씨(증언 당시 67세·구좌읍 종달리)는 당시 학살을 이렇게 증언했다.


"사건이 나던 날은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나도 다랑쉬굴에 같이 살았어요. 토벌 당시에 나는 굴 안에서 나와 있었는데, 구좌면 면당부에서 토벌대에 의해 다랑쉬굴이 습격 당했다며 면포를 주면서 시신을 잘 정돈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하도리 출신 오치악과 고완규 등과 함께 갔는데, 밤에 와서 보니 우리 마을 강태용이 죽어 있고, 나머지는 질식해 죽어 있었어요. 입구에는 불을 피웠던 흔적들이 쌓여 있었고, 굴 안은 그때까지 연기로 가득했는데 속에 들어가보니까 돌 구석, 땅 속에 코를 파묻고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코·귀에서 피가 나서 형편없었지. 하도사람 한 분은 손톱이 없을 정도로 땅을 파다 죽어 있었고...

우리는 시체를 수습했는데, 남쪽에는 하도 사람들을 일렬로 눕히고, 우리 종달리 사람들은 북쪽에 차례로 눕혔습니다. 10∼13명은 됐어요. 그때 눕힌 순서대로 1번 누구, 2번 누구, 기록을 했었는데 그 수첩은 피신다니다 보니 잊어버렸습니다."(1992년 3월 29일 증언)


그 때 채정옥씨는 입구 쪽의 굴만 살폈고 북쪽 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굴 안쪽에 있던 시신 한 구는 확인하지 못해 발견했을 때는 고통스럽게 사망한 당시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 44년 만에 세상에 나온 다랑쉬굴의 4·3희생자 유골. 10구의 유골은 가지런히 눕혀져 있고, 북쪽에 외따로 수습되지 않은 한 구의 시신이 있었다.

 


이날 다랑쉬굴에서는 최소 19명 이상이 학살됐다. 동굴 주변에서 추가로 희생된 8명은 구좌읍 종달리 출신의 박순녀(29) 박순녀아들(7) 이경수(51) 강희선(50) 부정순(28) 이덕일(9) 이홍규(31)과 구좌읍 하도리 출신의 윤재만(25)이다. 10세 이하의 어린이 3명, 50세 이상이 3명, 20∼30대 부녀자 4명, 이외 성인 남자 9명 등 가족단위 피난민들이었다. 희생자들은 김진생씨 일가, 고순경씨 형제, 박순녀씨 가족, 이홍규씨 가족 등 대부분 부부와 어린아이가 딸린 가족이었으며, 세가족은 5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특히 고순경씨 가족의 경우, 부모와 부인, 형 부부, 10세 이하의 조카 2명 등 가족 8명이 피신했다가 고순경씨 형제는 다랑쉬굴에서, 부모와 형수는 다른 곳에서 학살됐고, 어린 조카 2명만 살아 남았다.

 

 

▲ 희생자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들. 무쇠솥에는 희생자
들이 먹다 남은 음식인 듯 이물질들이 엉켜 있다.

이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동굴 속에 널려 있는 유물들만보더라도 이들이 단순 피난민이었음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허벅, 그릇, 솥, 항아리 등 취사도구와 쇠스랑과 톱, 곡괭이와 같은 농기구였다. 다랑쉬 굴 속에서는 플라스틱 안경, 흰색 단추, 혁대, 버클, 옷감, 고무신,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가마솥, 항아리, 물허벅, 접시, 놋쇠로 만든 제기용 잔받침, 물통, 프라이팬, 가위, 요강, 석쇠, 화로, 구덕, 주전자, 나무주걱 등의 생활용품과 낫, 도끼, 톱,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발견됐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던 유골 1구 옆에는 그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모, 군화, 철창, 대검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제주4·3 학살의 실상이다. 마을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미군정과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이 휘두른 살육작전으로 끔찍이 희생됐다.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은 군경합동토벌대가 굴 입구에 지핀 불의 연기에 숨이 막혀 참변을 당했다. 희생자들은 학살의 광풍을 피해, 오직 생존을 위해 어지러운 시국만 지나면 다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보겠다고 호미와 쇠스랑, 곡괭이를 들고 깜깜한 굴로 숨어들었던 종달리·하도리 주민들이었다.

 

 

 

다시, 바다에 수장된 슬픈 영혼들



이들은 죽어서도 오랜 세월 버림받는 운명에 처해졌다. 유족들은 몰랐었는가. 그렇지 않다. 학살직후 유족들은 토벌작전에 동행했던 민보단으로부터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렇지만 해안에서 4km 이상 중산간지대에 다니는 것은 '적'으로 간주되어 이유 불문하고 사살되기 때문에 다랑쉬굴까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폭도로 몰리는 것은 곧 죽음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었다. 다랑쉬굴의 희생자는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기 때문에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폭도=빨갱이'로 규정돼 있었다. 다랑쉬굴을 지척에 두고도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갇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유가족들은 한세월 죄책감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직계유족마저 4·3으로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남아있던 유족들마저 폭도가족이라는 세상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 고향을 떠나 버렸다.

 

 

▲ 파행적으로 치러진 조촐한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은
슬픔과 분노를 삭여야 했다.

그리고 44년이 흘렀다. 1992년 4월 2일, 제주4·3연구소에 의해 그 참혹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랑쉬굴의 유골이 최초 발견된 시기는 1991년 12월 22일 제주4·3연구소 조사팀에 의해서다.)

하지만 정부와 행정당국은 이데올로기로 덧칠하여 다시 한번 44년이 지나도록 구천의 혼백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던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슬픈 일이 발생했다. 다랑쉬굴 4·3희생자 유골 발견 이후 희생자들이 단순 피난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장례식 문제에 역사적 진실이 가려져 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 행정기관에서는 발견 초기부터 다랑쉬굴 희생자들을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갔고, 진실을 왜곡하기에 급급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판도였다.

그들은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일 현장으로 달려가 서둘러 바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발각되자 집단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허위주장이었다. 현장 목격자들이 나타나면서 진실이 아니었음이 판명나자 경찰은 다시 "다랑쉬굴은 남로당 유격대의 비밀 아지트였다"며 색깔논쟁으로 이어갔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왜곡된 주장은 장례식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무장대들에게 피해를 본 마을 주민과 유족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진 것도 이들 기관의 책임이 컸다. 경찰과 행정당국에서는 '폭도들의 무덤을 만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여론을 앞세워 당초 유족회의에서 '합동묘역을 조성해 안장'하기로 결정했던 사항을 '매장'이 아닌 '화장'으로 번복 결정하는데 앞장섰다. 다랑쉬굴 4·3희생자의 장례식을 '제주도민장'으로 치르고 4·3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는 디딤돌을 놓아 화합의 징표로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992년 5월 15일, 그 억울한 영혼들은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뿌려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저 음습한 동굴 속에서 44년을 기다려온 조상의 유골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혼백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던 후손들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 유골이 바다에 뿌려지던 날 다랑쉬동굴도 세상과 담을 쌓아버렸다.

 


시신들이 누워 있던 동굴 역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동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틀어막고 흙으로 덮어 버렸다. 억울한 영혼을 달래지도 못하고, 진상규명도 덮어둔 채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을 역사의 벌판에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아직도 동굴 속에는 수습하다 남은 유골들의 뼛조각과 그들이 사용했을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두 번 죽임을 당해야 했던 영혼들의 원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다랑쉬굴은 이제 진실의 역사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유물이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의 증거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다랑쉬굴이 있는 일대를 성역화 하여 억울한 영혼을 추모하고, 생생한 제주 4·3의 역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14년전 우리 제주도민들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고 말았다. 머리 숙여 비명에 간 제주 4·3 영령들과 다랑쉬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 굴렁쇠

'한국 근현대사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4.3의 슬픈 증언 (8)  (0) 2007.04.05
제주 4.3의 슬픈 증언 (7)  (0) 2007.04.05
제주 4.3의 슬픈 증언 (5)  (0) 2007.04.03
제주 4.3의 슬픈 증언 (4)  (0) 2007.04.03
제주 4.3의 슬픈 증언 (3)  (0) 2007.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