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5)

모산재 2007. 4. 3. 10:03

 

이 글은 4.3의 아픈 진실을 알리기 위해 굴렁쇠 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122066을 퍼온 것입니다.

 


▲ 부모들 / 강요배 그림


 

 

제주 4.3에 새겨진 '빨갱이'라는 이름


유태인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학살에서 출발한 나치 독일의 파시즘을 가리켜 '생명이 없는 송장사회'(carceral society)라 부르기도 했다.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혈통에 대한 생물학적 환상이 낳은 결과는 끔찍했다. 유태인의 대량학살이 그것이다.

이런 사례는 세계의 폭력적 질서를 형성하는 전형적인 뿌리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파시즘 폭력과 피와 혈통의 정치만이 민족과 인종, 그리고 종교의 이상을 회복한다는 극단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인디언을 몰아내고 필리핀·아이티·니카라과 등을 침공하여 민중을 학살한 미국, 티베트 민중을 학살한 중국, 동티모르를 무력 점령한 인도네시아 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육신'을 학대함으로써 지배와 통제의 정치기술을 완성하는 근대국가의 모험은 우리 인류 역사에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안겨줬다. 미셀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인종말살을 근대 권력의 꿈이라 규정했다. 권력이 삶, 인류, 인종의 근원 위에서 지배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물학적 통제와 말살정책은 극단주의를 낳는다. 극단주의는 인류를 파괴하고도 남을 가공할 위력으로 우리 삶에 등장했다.

제주 4.3에서 나타난 대량학살의 국가폭력도 극단의 시대가 몰고 온 인종말살의 정책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주4.3에 등장한 국가폭력은 '빨갱이 종자를 갖는 제주 섬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는 '죽임의 정치'로 나타났다. 이른바 반공국가의 건국과 자유주의 수호를 위한 지배와 통제의 정치기술이라 하겠다.

그러고 보니 58년 전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학살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반공규율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폭력이라 할 수 있다. 반공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는 이승만 정부의 폭력은 미군정의 정책의 연장선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빨갱이 소탕, 공비토벌이란 이름 하에 제주의 마을이 불태워지고, 무고한 주민을 공비와 내통한 자(통비분자)로 몰아 대량학살한 것이다. 빨갱이는 인간이 아니라 잡초이며 국가의 권력에서 배제된 열등한 인종으로서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이라면 나치 독일의 계획적인 유태인 말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 다루려는 증언은 제주 4.3 대량학살 속에서 '여성'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다. 무지랭이 제주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피해사례를 통해 반공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한 국가폭력의 도마 위에서 어떻게 남성과는 다르게 절망의 피를 뿌렸는지 더듬어 본다.

제주 4.3 대량학살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4개월간 군경에 의한 초토화작전 시기에 일어났다.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수행되는 동안 130개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탔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빨갱이 혐의를 씌워 섬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양민학살은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12월31일 해제될 때까지의 시기는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그 이듬해 봄까지 계속됐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을 남한의 반공정치체제에 대한 반란이며, 제주민중의 저항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양민 희생자들은 사상과는 관련없이 '빨갱이년' '빨갱이새끼' 혹은 '폭도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강간과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됐다. 나치의 유태인 말살정책이나 보스니아 사태에서 자행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인종청소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체제 안에서도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는 제주 섬사람들은 처음부터 씨를 말려야 하는 '청소대상'으로 존재했다.

미군정과 국가가 바라는 대로 제주 4.3이 성공적으로 진압됨으로써 고문과 살육으로 참혹하게 희생당한 제주 섬주민은 반공국가의 규율체계를 확립하는 끔찍한 모태가 돼버렸다. 4.3 당시 '빨갱이 사냥'의 선봉대로 제주도에 파견된 극우반공주의집단은 서북청년단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주도에 온 이유에 대해 "제주도는 붉게 물들었다"라고 말했다. 제주도는 하나의 빨갱이 집단으로 그리고 붉게 물든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했던 것이다. 결국 제주 섬사람들의 명찰에는 빨갱이의 이름이 새겨져 버렸다.

4.3이 발발하자 "빨갱이가 사태를 유발했다"고 단정하고 수백명의 서북청년단을 대거 파견하여 빨갱이 소탕의 선두에 서게 한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도에 휘발류를 뿌리고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소멸해야 한다"고 발언했다.(조순형 전 국회의원의 부친이 조병옥씨이다. 아직까지도 부친의 행각에 대해 제주도민들 앞에 엎드려 사죄해야 마땅하거늘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인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초토화 작전을 지휘한 제9연대 박진경 대령도 "제주 백성이 아니라도 나라가 된다"라며 빨갱이에 대한 인종청소를 정당화했다. 그것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에서 새로운 '반공의 섬'으로 개조하려는 역사적 시초가 된 셈이다.

 

 

 

제주 4.3에 새겨진 '여성'이라는 이름

 

 

▲ 겁간 / 강요배 그림

 

토벌대에 의한 여성의 수난은 집단강간과 반인륜적인 성폭력을 동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산부와 출산하고 있는 부녀자를 "빨갱이 종자이므로 없애야 한다"면서 총살하는 경우가 숱하게 저질러졌다.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행자 중 남녀를 지목하여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하거나 성기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폭파시키는 반인륜적이고 도착적인 성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집단광기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총살하거나 수장하거나 창으로 찌르거나 등의 살해방법을 쓰지 않고 왜 굳이 피해여성의 몸을 폭파해야 했는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폭파된 여성의 몸은 고문자의 성적 욕망의 배설을 의미하며, 또한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마을주민에게 '빨갱이 없는 반공사회'를 향한 국가폭력이 어떻다는 것을 강요한 것은 아닌지 살이 떨린다.

이것은 테러요, 인종적 증오이다. 여성을 빨갱이 인종을 재생산하는 생물학적 그릇으로 못박고 저지른 야만적인 반공국가의 폭력이었다. 그 증오는 4.3 이후에도 낙인 찍힌 '빨갱이' 또는 '폭도' 가족이나 친족에게 '연좌제'의 쇠사슬로 고스란히 대물림됐음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제주여성들은 '빨갱이년' 혹은 '빨갱이 가족'이라 하여 남편이나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대신 무고하게 학살당하고(이를 대살[代殺]이라 한다)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그러한 피해와 고통의 경험조차도 침묵당해야 하는 여성에게는 남성의 경우와 다르게 성적 폭력이라는 천형의 고통을 추가로 안겨줬다. 이는 소위 '빨갱이'에 대한 가혹행위 이상의 상징적 폭력을 의미한다.

입산자 아내에 대한 성폭력은 비일비재 했습니다. 어떤 여성의 남편은 경찰이었는데 남편이 입산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친구와 친척이 빨갱이로 지목되면 그 사람 또한 살아남을 길이 없게 되어 입산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집을 감시하던 남편 친구(경찰)와 정을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성관계를 맺으려던 순간 서청이 집으로 들이 닥쳤고, 아내와 남편 친구를 벌거벗긴 채 끌어내어 수용소에 가둬 두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제 성교를 시킵니다.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심한 채찍질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하게 됩니다. 그후 서청은 그 여성의 질에다 수류탄을 집어넣고 안전핀 고리에 실을 묶어두고 '뛰어가도 좋다' 말합니다. 그후 그녀의 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죠.(한림화, '4.3 당시 서북청년단에 의해 행해진 제주여성에 대한 테러' 1998.5, 여성인권과 평화 세미나 발제문)>

 

하루는 내가 제주경찰서에서 숙직을 하는데 여자의 비명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취조실로 가보니 여자를 나체로 만들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김호겸 증언, 서울시 은평구 역촌1동,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역임)>

 

성산포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청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고성중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1998)

 

여자들인 경우 아무 근거도 없이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얼굴을 비춰 골라 냈는데 (20세 미만의) 유독 젊고 예쁜 여자만 사상에 연루됐다는 말이냐. 성적(性的)인 문제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우리 형님과 사혼(死婚)하여 형수가 된 분은 당시 1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형수의 여동생은 당시 15세인데 유일하게 살아서 돌아왔다. 난 그분을 찾아가 여러차례 당시 상황을 물었지만 수치심 때문에 일체 말이 없었다. (김양학 증언, 62세, 표선면 토산리, 2002. 5. 22 채록)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이어 경찰은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폭도가족을 가려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인행 증언, 67세, 애월읍 장전리, 2001. 8. 21 채록)

 

삼양지서가 습격을 받자 며칠간 그곳에서 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서북청년회 출신 정 주임(정용철)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다 봤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여자들의 옷을 벗긴 채 망루 위에 오랜 시간 앉혀 놓았습니다. 난 벌벌 떠는 그들이 불쌍해 코트를 벗어 덮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했습니다. (김제진 증언, 78세, 한림읍 귀덕1리, 제주경찰학교 10기생, 2001. 11. 19 채록)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 주임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 정 주임 그놈은 오래 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고봉수 증언, 79세, 제주시 삼양2동 1999. 8. 28, 제민일보 보도)

 

희생된 여인은 김진옥(21)으로 당시 산으로 피신했던 김태생의 아내였다. 김태생은 이날 아내와 부모를 잃었고, 이튿날인 2월 25일에는 처조부를 잃었다. 또 며칠만에 장모와 처제를 또다시 잃었다. 김태생의 입산으로 양가 식구들이 모두 몰살당했다. 그런데 김태생이 ‘6.25 참전용사’라는 사실은 강경진압작전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에 인용한 사례는 생명을 배태한 몸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의 실상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하귀리에 사는 안인순(증언 당시 75세) 할머니의 동서(당시 21세)는 1948년 12월 28일 아이를 출산하는 도중에 학살당했다. 안씨 집안의 비극은 시동생 홍씨로부터 비롯되었다. 광복과 함께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시동생 홍씨는 1948년 4.3이 터지면서 당활동에 간여하고 있었던 듯 무장대를 따라 한라산에 들어갔다. 홍씨의 입산 후 그 해 12월 임신 중이던 홍씨의 처 즉 안인순씨의 동서가 친정인 애월읍 하귀리로 해산하러 가면서 사건이 터졌다. 보릿짚을 깔아놓은 방에서 출산 진통을 시작하던 동서에게 이른바 하귀특공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특공대란 4.3 이후 경찰을 보조하기 위해 마을별로 구성한 청년조직을 말한다. 특공대 소속 2명은 "입산자 가족은 종자를 말려야 한다"면서 마을 뒤편 뱅디(너른 들판)로 문씨를 끌고 갔다. 소식을 듣고 안씨가 달려갔을 때 동서는 가슴 여덟군데를 포함해 모두 열세군데를 철창에 찔려 숨을 거둔 뒤였다. 하문에는 나오다 만 아기가 걸려 있었다. 안씨는 남들 눈이 무서워 대충 흙만 덮어 가매장을 했다.(시사저널 1998. 4. 9)


안인순씨의 동서를 출산하는 도중에 살해한 자는 동네 이웃인 '오라방'(오라버니)이다. 그는 "빨갱이 종자를 말려야 한다"는 이유에서 살해했다. 출산하고 있는 도중에 살해를 했어야 할 다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의 몸은 생명을 배태한 몸으로 빨갱이를 재생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제거한 것이다.

'빨갱이의 몸'은 흐르는 피에 의해 사회를 붉게 물들일 수 있는 감염의 위험이 있는 몸이며, 동시에 피의 흐르고 침투하는 성질과 결부된 빨간색의 몸은 사회에 불온한 기운을 퍼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이여인에 가한 폭력은 '빨갱이'를 이유로 인종 말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용공혐의자로 연행된 주민들이 집결해있는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몸을 강제로 발가벗기거나 성적행위를 전시하는 것은 그 당사자 여성 개인에게 뿐아니라 그곳에 모여 이 광경을 강제로 보고 있어야 하는 주민 전체에게 자행하는 성폭력과 같다.

 

 

 

제주 4.3이 해결해야 할 고통받는 '몸'에 대한 예의



제주 4.3 속에서 여성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침묵한다.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침묵하도록 통제하는 것은 다름아닌 여성의 순결과 정조에 대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여성의 순결성은 가부장적 공동체의 순결을 상징하고 여성의 모성은 공동체 정체성의 보루이기 때문에 여성의 순결과 모성의 파괴는 공동체 전체의 수치이며 상실이라 볼 수 있다. 강간의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여성의 침묵은 남성의 수치를 보호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강제된 것이라 하겠다.

가부장제적 폭력에 의한 제주 4.3의 여성피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반군의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어 집단적으로 강간당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여성들의 침묵과 매우 유사하다. 여성의 몸은 개인에 속하지 않고 가부장제 권력에 귀속되었으며, 그들의 지배적 언어로부터 소외되어 왔던 모습이 똑같다. 여성의 몸에 각인된 반공폭력과 성폭력의 고통과 참혹한 상처, 그리고 죽음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 세계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가? 피해 여성들이 찢겨지고 살해당한 몸의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일련의 질문은 4.3의 대량학살과 전쟁강간 그리고 성폭력과 같은 비인도적,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만난다.

폭력의 직접적인 행위자이든 보이지 않는 제도이든 대량학살과 성폭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즉 정치인, 장군, 사병, 민간인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에게 그러한 폭력행위를 명령하고 정당화해 준 국가 자체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 그리고 미군정과 미 군사고문단도 이 끔찍한 역사의 가해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은 죄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대량학살, 반인륜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 전쟁강간에 따른 희생자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제주 4.3 진상규명의 과제이다. 전쟁과 학살의 역사 앞에서 일그러진 성관념으로 짓이겨진 여성학대와 강제성노예범죄를 더이상 외면하거나 방치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평화와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슬프고도 처절한 비극의 감옥에서 여성이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걸어나와 인류 역사 앞에 우뚝 서게 하려면...우리 인류 역사가 그동안 짓밟아 온 '고통받는 여성의 몸에 대한 예의'를 먼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굴렁쇠

 

이 글은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와 '국가 폭력과 여성체험 - 제주 4.3을 중심으로'(김성례) 자료를 기본텍스트로 삼았으며, 이외에 학술 발표 자료들을 참고하였습니다.   /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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