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7)

모산재 2007. 4. 5. 14:08

 

이 글은 굴렁쇠님이 쓴 글(http://blog.ohmynews.com/rufdml/128018)을 퍼온 것입니다. 4.3의 아픈 진실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천명 / 강요배 그림

 

 


섬, 그 민중의 뿌리가 초토화 되다


제주도를 '빨갱이섬'이란 딱지를 붙인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기어이 화산섬 제주를 '피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섬, 그 민중의 뿌리는 대량학살의 광풍으로 흔들리고 뽑히고 짓이겨졌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전개된 '초토화 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 4.3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이 강경진압작전은 송요찬 9연대장의 지휘아래 이루어졌다. 10월 17일, 송요찬 중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은 대부분이 중산간마을이다. 그들이 무장대 근거지라고 하는 산악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토화 작전을 알리는 이 포고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제주 섬주민을 모두 빨갱이로 내몰아 죽이기 위한 피의 살육작전을 예고한 것이라 밖에 볼 수 없다.

 



▲ 1948년 11월 중순 경부터 초토화 작전이 전개됐다.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온 수용자들.

강경 진압 작전으로 예로부터 지켜오던 중산간 마을 37,000여 초가가 불에 타 사라졌다. 조사자료에 의하면 4.3사건으로 39,285채가 불에 타 없어졌고, 이중 95%가 초토화 작전 4개월 동안에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 4.3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삼진작전'으로 한라산 기슭은 그야말로 공포와 죽음의 상징이 돼 버렸다.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자 생활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여명은 토벌을 피해 입산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 4.3에서 '입산자'는 곧 발각되는 대로 처형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들 입산자와 해안부락으로 소개되어 내려온 입산자 가족은 이른바 '빨갱이 가족=도피자 가족'이 되어 다시 죽음으로 내몰리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자기 가족 대신 죽는 대살(代殺)로 많은 섬주민들이 해안부락에서도 아무런 죄없이 죽어갔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섬주민들의 분노와 공포가 어찌 사그라들 수 있었으랴.

1948년 11월 13일(음력 10월 13일)은 제주 4.3 역사에서 '살륙의 날'로 기록된다. 초토화 작전의 신호탄은 제주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조천면 교래리·와흘리 2구·신흥리, 애월면 소길리 원동마을, 안덕면 상천리·상창리·창천리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 이들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진압군)는 혼비백산해 있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총살했다.

지난 주말에 조천 교래리 마을을 다녀왔다. 58년 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려 뼈와 살을 묻던 집을 찾을 수 없었으나 그날의 피울음 만큼은 가슴팍에 매달려 떠나지 않았다. 비극의 현장을 말없이 지켜봤을 아름드리 팽나무와 대나무로 에워싼 수난의 흔적만이 불타버린 역사를 이어주고 있었다.

 


초토화 작전의 신호탄, 조천 교래리 마을 학살사례


조천면 교래리는 설촌 700년의 유서가 깊은 중산간 마을이다. 1948년 11월 13일(음력 10월 13일) 새벽 5시께 군인들이 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집집마다 들이닥쳐 다짜고짜 불을 붙이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오던 주민들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날이 밝아 총성이 멎었을 때 100여 호 모여 살던 교래리는 하룻밤새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 이 팽나무 아래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교래 마을에는 그날의 참상을 기억하는 수백년된 팽나무가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의 무차별 학살극으로 확인된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양재원(60) 양재원 처(60) 김만갑(57) 양관석(여, 50) 부자생(44) 부영숙(여, 38) 부영숙 아들(3) 고계생(여, 18) 고옥심(여, 14) 김순재(여, 14) 김문용(9)이 숨졌다. 특히 김인생은 이날 할머니 강씨(70), 어머니 김채화(45), 여동생 김영자(15), 남동생 김순생(10), 이름 안 지은 남동생(5), 형수 양남선(25), 여조카(8), 남조카(5), 남조카(3), 5촌 김성진(65), 5촌 김성지(63), 김성지 처(60), 사촌형수 신보배(25), 그리고 형님댁 애기업개 신아무개(15) 등 가족과 친척 14명을 한꺼번에 잃었다.(희생자 중 김만갑과 양관석은 죽지 않고 며칠을 더 버텼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김만갑은 11월 17일에, 양관석은 11월 30일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희생자는 주로 노약자이고, 어린 아이들이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총에 맞은 채 불에 타 버렸고, 열네살 난 어린 소녀의 시신에는 대검이 찔려 있었다. 이날 아홉살 난 아들 김문용을 잃은 양복천(梁福天·당시 30세) 할머니는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 날 남편과 조카는 미리 피신했고 나는 아홉 살 난 아들, 세 살 난 딸과 함께 집에 있었어.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지. 그러나 설마 사람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난 집으로 들어와 불을 붙이는 군인들에게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손으로 막 빌었어.

그러나 군인들은 나를 탁 밀면서 총을 쏘았지.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고.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발을 쏘았어.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해.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

그들은 인간이 아니야. 그들이 나가버리자 우선 아들이 불에 탈까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담요를 풀어 업었던 딸을 살폈지. 그때까지만 해도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다리는 손바닥만큼 뻥 뚫려 있었어.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다리까지 부숴 놓은 거야.

그 후 숲에 가서 한 열흘쯤 숨어지내다 보니 해변마을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와서 조천리로 내려갔지. 난 지금도 허리를 못 쓰고 딸은 지금까지도 잘 걷지 못하는 불구자야. 그 전에 피하라든지 해안으로 내려가라든지 하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 밤중에 못된 군인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한 일이라 그날 많이 죽은 거지.   - 梁福天·여·증언 당시 84세, 조천읍 대흘2리, 2001. 10. 17 채록 증언


이날 여섯살 난 한 어린이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총에 맞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 아이는 김용길(아명 김창식)이었다. 역시 총에 맞아 숨져 가면서도 급히 손자를 담요에 싸 대밭으로 던진 증조할머니 덕분에 불에 타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김용길은 한 화재사건을 통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 한 언론은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50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다간 김씨의 한많은 삶을 이렇게 보도했다.

4.3이 남긴 숱한 한들의 궤적을 그리며 토벌대의 총탄에 의해 평생을 불구로 지탱해 온 김용길 씨(51)가 8일 오전 제주시 아라동 이름 없는 과수원 판잣집에서 화염 속에 삶의 질곡 만큼이나 안타까운 모습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제민일보, 1993년 11월 9일)

 

 

▲ 불타버린 자리에는 초록생명들만이 한많은 역사를 잇고 있다.

 

김용길은 당시의 총상으로 한평생을 오른팔 한 번 제대로 구부리지 못했다고 한다. 왼쪽다리는 관절뼈가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평생을 목발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30세 때 결혼해 딸을 낳는 등 잠시 행복도 맛봤다. 그러나 어린 딸이 두 살 되던 해 아내가 둘째아이를 임신했다가 숨을 거두었다.

딸 하나 열심히 키우기 위해 집과 밭을 처분하고 품팔이도 마다 않던 김용길은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딸을 이모집에 맡기고 자신은 낯선 아라동 과수원 판잣집에서 혼자 살아왔다. 그러던 중 그 판잣집에 화재가 발생해 화염에 휩싸인 채 한으로만 점철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제주 4.3, 그 모든 슬픔을 털어낼 때까지


제주의 자연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오순도순 살던 공동체 마을이 공권력에 의해 사라진 통곡의 역사. 비록 초가였으나 어떠한 사나운 태풍에도 끄덕없이 섬사람들의 바람막이가 됐던 삶의 안식처도 국가공권력과 미군정이 휘두른 총칼 앞에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던 세상.

나는 제주 4.3의 역사적 기억을 섬사람의 응어리진 가슴 속에서 만나면서 이땅의 슬픈 후예들이 아직도 좌절하지 않고 잘 버티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다.

58년 전 죽음의 시간 만큼 절망과 한숨, 두려움과 공포로 이어졌던 지난 제주의 역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쩌면 아직도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어서 끝났으면 하는 희미한 욕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방황은 이 나라 분단으로 시작된 4.3이 우리 민족의 자주적 통일로 매듭지어져 모든 슬픔을 털어낼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 굴렁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