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섬 여행

소매물도(2) 어둠의 바다를 밝히는 해안절벽 등대섬

모산재 2009. 2. 17. 10:36

 

동백 등 상록수가 울창한 숲을 이룬 소매물도 본섬과는 달리 등대섬은 섬 전체가 풀밭으로 된 아담한 구릉이다. 그 아담한 구릉 위 가장 높이 솟은 곳은 바위 절벽을 이루고 그 절벽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등대가 섰다.

 

'가장 아름다운 등대가 있는 등대섬', 이 등대섬이 있어서 사람들은 소매물도를 찾는다.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초원의 길을 걸어 하늘을 향해 언덕을 오르다보면 등대가 맞이한다. 등대 위에 올라서 망망대해를 둘러보다 문득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보면 천길 낭떠러지. 그곳이 바로 등대섬이다.

 

 

등대섬은 본섬(소매물도)의 4분의 1 정도로 2,000여 평의 작은 섬이다. 본래 이름은 해금도(海金島)로 등대와 어우러진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등대섬이라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등대도이다.

 

 

 

▼ 등대에서 돌아본 소매물도 본섬. 왼쪽 멀리 삼여도가 보인다.

 

 

 

 

 

▼ 등대섬을 관리하기 위한 관사. 이곳에는 등대지기 네 사람과, 본섬 출신의 일가족 4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 공룡바위 뒤로 보이는, 길게 늘어선 섬이 어미섬인 매물도이다

 

 

 

 

 

등대섬과 소매물도 공룡바위, 그리고 멀리 대매물도가 어울려 빚어내는 이 최고의 절경을 찍기 위해 전국의 사진 작가들이 이 등대섬으로 몰려든다. 소매물도 등대는 여행작가들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로 평가받아 여행관련 잡지에도 자주 소개되며, 영화의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소매물도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 수탈을 위한 항로를 위해 세워졌다. 처음에는 무인등대였지만 1940년 유인등대로 전환되었다. 하얀 원형 등탑은 높이 16m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프리즘 렌즈를 사용한 대형 등명기를 이용해 약 48km 거리까지 불빛을 비춘다 한다.

 

 

 

 

 

 

▼ 등대 맞은편에 솟은 바위

 

 

 

 

 

등대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나 있는 절벽 길을 따라 걸어보면 소매물도 등대섬이 삶의 의미로 와 닿는다. 영원의 하늘로 우아하게 솟은 등대 아래로 섬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파도를 맞이하고 있다. 절망의 벼랑 위에서 어둠의 밤바다를 향해 불을 밝히는 섬, 그것이 등대섬이다.

 

 

▼ 등대 맞은편에 높이 솟은 병풍바위.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용바위, 처바위, 촛대바위(곤장여)

 

 

 

 

 

 

 

등대섬 병풍바위 뒤의 절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면 진시황의 사자가 불로초 구하러 왔던 '글씽이굴'이 있다고 한다. 아치형의 커다란 동굴은 열십자처럼 생겨 십자동굴이라고도 하는데, 글씨가 바위에 씌어 있어 '글씽이굴'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중국 진시황제가 보낸 서불이 3천의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불로초를 구하러 이곳까지 왔다가 이 동굴 위에 '서불이 이곳을 지나간다'라는 뜻의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네 글자를 써놓고 갔다고 전해진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00여 년 전만 하여도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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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은 문헌상으로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徐巿'는 '서불'이라고 읽는다.) 천하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제나라 출신의 서불(徐福)은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야 할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 상소를 올린다. "저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기원 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두번에 걸친 서불의 여행이 시작된다. 진황도를 떠난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그는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는 서불이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온다.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대만을 가리키며,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자들은 정방폭포의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를 근거로 단주(亶洲)를 제주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주도 서귀포에는 서복기념관도 있다.)

서불의 상소문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요, 영주산(瀛洲山)은 한라산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옛 문헌에도 서불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 이인로의 <파한집>과 조선시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가 그것이다. 일본에서도 미야자키현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서불의 흔적이 남아있다.

 

 

 

 

▼ 등대섬의 남서쪽 끝 주변 풍경

 

 

 

 

 

 

▼ 등대 동쪽의 해안절벽

 

 

 

 

 

 

다시 등대섬에서 나와 등대섬을 돌아본다. 늦은 오후 비껴 비치는 햇살에 잠겨 등대섬은 흐릿하다. 병풍바위 저 너머 수평선 위로 아스라히 보이는 작은 섬은 무엇일까.

 

 

 

 

 

스스로 까마득한 절벽으로 서서 묵묵하게 파도를 맞이하는 섬, 스스로 절벽 아래 어둠의 바다를 밝혀 등대가 된 섬, 등대섬을 뒤로 하고서 망태봉으로 향한다.

 

 

<계속>

 

 

 

 

▼ 등대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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