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시대 건너 가기

박근혜의 '건국절' 시도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음모[스크랩] / 김삼웅, 이만열

모산재 2015. 10. 30. 09:30

 

 

 

 

 

 

 

 

박근혜의 ‘건국절’ 시도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음모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

새날희망연대 포럼 강연 / 서울의소리 2015.10. 04

 

 

 

무릇 사필(史筆)은 공정 ․ 엄격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실에 근거한 춘추필법이 요구되고, 난신적자가 부르르 떨게 만든다.

 

절대왕정인 조선시대에도 사관들이 쓴 사초(史草)와 실록은 임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딱 한번 예외가 있었으니 폭군이라 칭하는 연산군이 재위 10년이 지난 때 ‘가장(家藏) 사초’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명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도 고치거나 실록을 볼 수는 없었다. 왕조시대에도 이처럼 역사의 기록은 공정하고 엄격하고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유엔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고래로 3류급의 위정자들이 역사를 뜯어고치고자 한다. 후세의 평가가 두렵고 세습권력이나 아류정권을 세우기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을 삭제 ․ 변형 ․ 왜곡시키고자 한다.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이 줄기차게 교과서를 뜯어고치고 역사를 왜곡한 것이나, 이명박 ․ 박근혜 정권이 교과서 국정화와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축소 등의 시도는 일란성 쌍둥이와 3류급 정치세력의 역사코메디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가장 먼저 서두른 공작의 하나는 전국적으로 우리의 사서(史書)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찌는 취임하자마자 총독부에 취조국을 설치하고 이른바 ‘불온서적’을 압수하였다. 병탄 이틀 후인 1910년 9월 1일부터 <관보>를 발행하는 기민성을 보인 총독부는 11월에 이미 설치한 취조국을 통해 전국 각 도 ․ 국 경찰과 헌병을 총동원하여 조선의 사서(史書)를 비롯하여 전통 ․ 문화 ․ 예술 ․ 인문 ․ 전기 ․ 열전 ․ 충의록 ․ 무용전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총독부는 1918년 말까지 8년 동안 20만 권에 이르는 조선의 사서를 불태우거나 진귀한 자료는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일제의 조선사서 말살책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22년 12월 총독부는 훈령 제64호를 통해 조선사편수위원회(조편위)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조선사의 왜곡과 날조를 시작했다.

 

일제는 조편위를 설치하면서 그 목적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일제가 조편위 작업에 얼마나 비중을 두었는지는 총독이 빠지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고, 위원장을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총독부 주요 인물들과 일본의 대표적인 관학자들을 위원으로 끌어들였다. 한국인 중에는 경학원 부제학 정만조, 중추원참의 유맹 ․ 어윤적, 총독부 편수관 이능화 등이 위촉되었다. 또한 이완용 ․ 권중현 ․ 박영효 ․ 이윤용 등 매국노들이 편수회의 고문이 되었으며, 최남선 ․ 이병도 등이 편수관 등의 직책을 맡았다.

 

조선사 왜곡의 분량이 많아지면서 일제는 조편위를 조선사편찬회(조편회)로 격상시키고 일왕의 칙령으로 설치 근거의 격을 높이면서 다수의 조선인 어용 사학자들을 참여시켰다. 일제는 1937년까지 27년 동안 무려 97만 5,534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 <조선사> 35권,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편을 편찬하였다. 이 방대한 조선사 기술의 기조는 철저하게 사대주의, 당파성, 문화적 독창성 결여를 과장 확대하는데 주어졌다.

 

일제의 조선사 왜곡날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땅을 속국으로 지배하려는 야심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본래부터 북반부는 중국의 속국이요, 남반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억지를 ‘역사적 사실’로 꾸미고자 온갖 괴변과 망설을 끌어들였다. 일제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芥)가 1945년 9월 조선을 떠나면서 “조선이 옛 영광을 되찾을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게 총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었기 때문이다.”란 망설을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이 망설은 적중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국사)는 조편회에 참가했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근년에는 뉴라이트계열의 관학자들에 승계되었다. 이들의 역사관은 ‘조편회’에서 편찬한 내용이 주조가 되고 있으며, 박근혜 정부의 교과서 국정화와 역사교과서 왜곡 등이 여기에 뿌리를 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식민사관의 원류가 되고 친일세력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건국절’ 운운은 몰역사의 극치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70주년의 8ㆍ15경축사에서 분명한 어조로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동안 뉴라이트계열의 학자, 족벌신문, 어용지식인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을 박대통령이 공식 언급한 것이다. 한마디로 대단히 몰역사적인, 반역사적인, 그리고 반헌법적인 언급이었다.

 

건강한 야당이 존재한다면 탄핵소추감이다. 우리나라의 헌법 전문은 헌법정신과 원리가 집약돼 있는 문헌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8ㆍ15건국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음모의 근원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아들과 딸'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선언한다. ‘임정법통’ 계승은 국민적 합의이고 헌법정신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사는 제헌헌법과 4ㆍ19혁명 후 개정된 헌법 그리고 6월항쟁 후 여야 합의로 개정된 현행헌법만이 정당성이 부여하고, 나머지는 모두 독재자가 임의로 또는 권력연장을 위해 변칙ㆍ날치기ㆍ계엄령 아래서 만들어졌다. 여야 합의로 개정된 현행 헌법은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를 명문화하였다.

 

임시정부 법통승계는 헌법 전문 선언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 보수세력이 우상으로 섬기는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이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임시정부를 계승, 재건하자고 강조하고 “대한민국 30년에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언명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만든 헌법 전문에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하고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문화하였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 정부수립 후 발간한 관보 제1호에서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는 임시정부 연호를 이어서 사용하고 ‘대한민국 재건’이라고 표기하였다. 헌법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하고 대한민국 관보 제1호에 임시정부의 연호를 사용한데도 불구하고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건국절’을 내세우는데는 그들만의 이해관계와 배경이 따로 있다.

 

한마디로 보수세력의 ‘혈통’인 친일을 세탁하려는 속셈이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유지되는 한 친일문제는 끊기 어려운 족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8년 8ㆍ15를 건국절로 삼아 친일파들을 건국의 주도세력으로 내세우고 자신들이 ‘건국’의 적자 노릇을 하려는 술책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이른바 건국절이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헌법정신을 정부가 앞장서서 침해하는 반헌법 사태가 발생한다.

 

둘째,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그리되면 일본에 대한제국 병탄의 책임도, 성노예문제도, 약탈해간 문화재 반환 등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베 신조 일본이 가장 바라는 바이다.

 

셋째, 남북 통일 문제는 역사성을 잃게된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건국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동년 9월 9일 건국했으니 전혀 딴 나라가 되어 통일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찾을 수 없어진다.

 

넷째, 역시 헌법위반이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라고 명시되었는데, 48년에 각각 분리 독립한 북반부의 영토권을 주장할 헌법적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다섯째, 정부수립 이전의 해외 항일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무국적자가 되고, 1910년 국치로부터 정부수립일까지 38년의 국맥 단절이 나타난다. 27년의 임시정부와 내외의 모든 독립운동, 심지어 미군정 3년도 딴나라의 일이 된다.

 

여섯째, 매국노ㆍ친일파ㆍ부일협력자ㆍ간상배들의 죄상을 밝히거나 죄값을 물을 수 없다. 딴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중동ㆍ아프리카 등 신생국가와 같은 나라가 된다. 헌법전문 초두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과 배치된다.이 역시 반헌법적인 행태이다.

 

 

박근혜정부가 기를 쓰고 건국절을 시도하는 이유와 배경을 압축하면, 선대들의 친일 죄상을 덮고, 이들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환치하면서 후손들이 기득권을 유치하려는 역사 왜곡이고 정치적 곡예이다. 이를 위하여 교과서를 국정화하여 선대들의 죄상을 덮고자 한다.

 

박대통령은 아베 일본총리의 군사대국화와 역사왜곡을 두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술책”이라고 비난했다. 건국절 시도와 국정교과서 추진을 두고 똑같은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일본의 한국침략 미화와 여성 성노예 부정 등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등 고대사 왜곡에 시달리고 분노해온 국민에게 이번에는 박근혜정부가 나서 국정교과서 전환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교과서 국정화는 유신회귀

 

우리 국민은 역사왜곡의 3각 파도에 휩쓸리면서 정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사 교과서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친일행위를 미화하고, 이승만ㆍ박정희의 독재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반민족ㆍ반민주의 ‘정권교과서’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과서 국정화는 정부의 건국절 시도와 같은 뿌리에서 같은 줄기로 진행되는 역사적 퇴행이라 할 수 있다. 정부ㆍ여당과 어용지식인ㆍ관변단체들을 총동원하여 추진하고 있는 교과서 국정화의 목표지점은 딱 한가지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일제의 식민통치와 친일을 미화하고 이승만ㆍ박정희의 역사적 죄상을 면탈시킴과 더불어 이들을 건국세력으로 내세워 그 후예들이 영구집권하려는 정치적 술책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5년 근대교과서가 제작된 이래 우리나라의 교과서 발행은 줄곧 검인정체제였다. 그러던 중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일으키고 1974년 1학기부터 초ㆍ중ㆍ고교 국사교과서의 검정제도를 전면 폐지, 국정교과서를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유신정권이 국정 교과서를 강제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반공과 민족중흥이었다.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교육보다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만들고, 전두환의 5공체제와 노태우의 6공시대를 거쳤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현상은 중ㆍ고등학교 때에 유신예찬과 민족중흥을 배워온 학생들이 유신과 5공타도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이다.

 

국정교과서 발행 체제는 2007년 6월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라 전면 폐지되었다. 33년만에 검인정 교과서 체제를 회복한 교과서 발행이 지금 다시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부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정부ㆍ여당이 교과서 국정화를 고집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좌파세력이 학생들에게 부정적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어서” (김무성)라고 한다. 정의로운 사람들을 좌파로 몰고, 친일파ㆍ독재정권 비판을 ‘부정적 역사관’이라 매도한 것이다.

 

현재 국정교과서를 펴내고 있는 나라는 선진국은 하나도 없고 북한ㆍ방글라데시ㆍ이란ㆍ이라크ㆍ시리아ㆍ수단 등 독재국가이거나 내란 또는 전쟁 국가들뿐이다. 중국은 공산당 1당 체제인데도 교과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검정제로 바뀌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ㆍ몽골ㆍ체코ㆍ폴란드 등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하나 같이 검인정체제로 돌아왔다. 다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사(자국사)’를 검인정으로 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나 지식인ㆍ교사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는 프랑스, 스웨덴 등이 검정제보다 더 나아간 자유발행제를 실시하고, 이같은 사례는 더 늘어나고 있다.

 

선진화를 지향한다는 박근혜 정부가 가장 후진적인 교과서 검인정을 선호하는 것은 교과서까지 자기를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분장하려는 정치적 욕망 때문이다. 헌법정신의 위배일뿐 아니라 민주주의 정신과 학문의 다양성을 억누르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사해석을 국가가 독검하는 체제는 팟쇼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④는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규정하였다. 국정교과서는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은 물론 정치적 중립성을 심각하게 해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역시 헌법 위배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뉴라이트계열이 제작한 교학사판 교과서 채택률이 0%에 불과해 크게 수모를 겪은 수구세력이 이번에는 검인정이라는 더욱 위험한 칼을 뽑아들고 범정부적인 조직을 동원할 태세이다. 이를 막지 못하면 우리의 민주주의 교육은 벼랑으로 몰리게 되고, 내일의 일꾼인 청소년들이 편향되고 획일적인 교과서를 통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대신 친일과 기회주의를 삶의 지표로 신봉하게 될 지 모른다.

 

정부의 국정교과서 분위기를 타고 한국 교육과정평가원 역사과정 연구팀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비중을 40%로 줄이는 시안을 만들고, 이명박이 세운 역사박물관은 새 부스를 제작하여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찬양하고, 뉴라이트의 대표적 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를 두고 “진중하게 쓰인 훌륭한 문장”이라고 말했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다고 했듯이, 이들의 전조(前兆)에서 국정교과서 체제가 보일 한국사회의 어두운 미래상을 점치게 한다.

 

출처 : http://www.amn.kr/sub_read.html?uid=21686

 

 

 

 

 

 

국정화론자들의 논거-'좌파'ㆍ'좌편향'과 '자학사관'

 

 친일·독재 비판하면 좌편향?

잘못 반성하면 '자학'인가?

 

 

이만열 | 슥명여대명예교수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교육부 장관 황우여와 여당 대표 김무성이 쌍두마차가 되고 몰이꾼이 고삐를 잡은 채 여당의 대변인과 의원들도 옆에서 반주를 넣어가며 국정화 고지로 몰아가고 있다. 최근 모 의원은 고교 때에는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야 하며 국사교과서에 특정 학자들의 정치 성향이 반영되어서는 안된다고 언급했다. 옳은 말인 것 같지만 잘못 짚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전에 정부·여당의 교과서 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있던 보수언론들이 국정화를 비판하면서, 검정교과서에 대한 그들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넘쳐나는 이런 발언들을 종합하면 국정화의 논거가 어렴풋이 감지된다.

 

비판의 핵심은 검정교과서가 좌파에 의해 집필되었고 좌편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사설은 “좌파성향 학자들이 대거 필자로 참여하면서 각급 학교 역사 교육은 반(反)대한민국 정서를 심는 온상이 되고 말았다”고 언급하면서 ‘반대한민국’이라는 말도 보탰고, 김무성은 현행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빠졌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판 외에도 비교적 단편적인 지적도 있다. 통일된 단일 교과서가 분단하에서 사상적 대결에 유용하다는 것, 단일 교과서라야 대입(수능)에 혼선을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이건 다분히 학부형들을 의식한 듯하다)도 있고, 검정교과서가 민중사관에 입각해 있다는 좀 엉뚱한 비판도 있다.

 

필자는 이런 문제 제기의 근거가 박약하고 다분히 선동적이라고 본다. 그들의 솔직한 속내는 역사교육을 통해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인간으로 키워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좌파’ 혹은 ‘좌편향’이라는 점과 ‘자학사관’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언급하겠다.

 

 

친일반민족ㆍ독재부패를 비판하면 '좌파'ㆍ'좌편향'?

 

비판자들은 한국의 역사학계가 ‘좌파’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좌파’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구에서처럼 ‘좌파’라는 말이, ‘보수’=‘우파’에 대응하여 진보와 혁신을 말한다면, 그것은 곧 진보적 성격을 가진 역사학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좌파’가 진보와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왜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에 저촉할 수도 있는 ‘반대한민국’이라는 용어는, 정부의 검정을 받았고 또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두고 한 말로는 지나치다. 역사학이 상찬과 포폄을 겸하고 있다면 역사는 마땅히 독재와 부패에 대해서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비판을 ‘반대한민국’으로 오인하는 이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대한민국은 북한체제와는 달리, 그런 비판을 감수하지 못할 정도로 결코 허약하지 않다.

 

한편 ‘좌파’라는 말은 전쟁까지 치른 분단한국에서 진보적인 것으로만 사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좌파’라는 용어를 ‘붉은 색깔’과 연계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말에는 해명과 책임이 분명히 뒤따라야 한다. 어떤 내용이 ‘붉은 색깔’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과 유신 독재 및 신군부의 파쇼 체제를 거치는 동안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와 식민지배 및 친일파에 대한 연구가 크게 탄압을 받았다. 뒷날 뉴라이트로 옷을 갈아입은 모 교수는 당시 가장 진보적인 경제사학자였지만, 그의 삼일운동사에서 민족대표가 친일했다는 것을 밝히는 바람에 잡혀 들어가 사과문을 발표한 후 풀려나왔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하여 역사연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젊은 역사학도들은 학회와 서클을 조직하고 감옥갈 각오로 일제시대사를 파헤치고 친일파를 폭로했으며 항일독립운동사와 민주화 운동사를 연구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독재체제 하에서 부패와 결탁되어 있던 친일세력들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자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는 북의 역사학 성과를 일정하게 수용, 가짜 김일성론을 극복하고 그의 항일투쟁도 적시했다. 북의 역사학이 남의 항일운동사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좌파’·‘좌편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소아병적이 아닐까.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한국의 근현대사는 친일·독재 세력 중심에서 항일독립․인권민주 세력 중심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남북 기본조약이 체결되고 한반도의 비핵화가 선언되면서 종래의 ‘적대적 공생관계’는 ‘평화통일’ 지향으로 변화되는 듯했다. 남북에서 분단을 즐기던 세력이 있었다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학문 풍토의 이 같은 변화가 그 10여년 후 2001년부터 사용된 한국근현대사 검정교과서에 반영되었다.

검정교과서들은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계승된 독립·민주의 두 정신을 토대로 “조국의 민주적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강조하는 교과서를 만들려고 힘썼다. ‘6.15 선언’과 관련된 사진이 교과서에 오른 것은 이런 헌법적 가치의 상징성을 의미했다. 이런 점을 두고 비판자들이 ‘좌파’ 혹은 ‘좌편향’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직도 친일반민족·독재부패의 연결고리를 단절하지 못한 정신적 아노미 현상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침략과 잘못을 반성하면 '자학사관'?

 

최근 자주 쓰이는 ‘자학사관’이라는 말도 그렇다. 그 말은 스스로를 학대하는 역사관이라는 뜻으로, 일본 극우세력이 즐겨 사용했고 한국의 뉴라이트들이 무비판적으로 갖다 썼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자민당을 대신하여 사회당 등 야당연합이 정권을 잡았을 때다. 이때 ‘종군위안부’의 일본정부 책임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나오고 이어서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배를 통렬하게 반성하는 담화를 냈다. 자민당은 집권을 위해서 먼저 이런 역사이해부터 부정하려 했다.

 

1993년에 자민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고, 1995년 1월에는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학사관’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이 연구회를 만들었으며, 이는 과거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대동아전쟁총괄〉(1995)을 작성했고 그 이듬해 말에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으로 발전, 2002년 저 악명 높은 후쇼사(扶桑社)판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냈다.

 

‘자학사관’이란 용어를 즐기는 이들은, ‘올바른 애국주의’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이 저지른 전쟁을 모두 정당한 것으로 또 연합국을 부당한 존재로 재평가하려 한 저간의 사정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또 ‘자학사관’이란 말을 사용하려면, 그들이 사용하는 이 말이 일제 침략의 대상이었던 한국민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임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현 총리 아베신조는 이런 일련의 진행과정에서 자민당의 젊은 정치인으로 역할을 했고, 이때 심화된 그의 ‘역사관’이 종군위안부 문제 등에서 사과할 줄 모르는 자폐성 역사관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검정교과서를 ‘좌파’·‘좌편향’이라 부르고, ‘자학사관’으로 몰아가려는 이들은 먼저 이런 용어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들과 언론은 그런 용어 사용에 특히 신중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정부 책임 하에 검정된 교과서에 대해 무책임하게 비난을 퍼붓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출처 : 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