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여행

억장이 무너지다

모산재 2012. 10. 7. 11:13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니 퀴즈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다. 마침 인체 장기의 해부도를 보여 주면서 다음 중에서 이와 관계없는 말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주어졌다.

 

 

부아가 치밀다.  
비위를 맞추다.  
배알이 꼴리다.  
억장이 무너지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답이 없다. '부아'는 '허파'를 뜻하는 말이고, '비위'는 '비장과 위장'이고, '배알'은 '창자'이고 '억장'은 '가슴과 창자'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잘못됐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진행자가 답을 '억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억장'은 '억장지성'의 준말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억장지성'이라니!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한자성어다.

 

'억장'이라는 말을 당연히 '가슴 억(臆)'자에 '창자 장(腸)''으로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쓴 문장을 더러 보았던 터에 처음 듣는 '억장'의 뜻을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 볼 수 밖에.

 

 

그래서 펴든 국어 사전(이기문 감수)에는 '억장'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억장1               ‘가슴’의 속된 말. 복장    '억장이 무너지다'  몹시 분하거나 슬픈 일이 있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다.
억장[億丈]2     매우 높음

 

 

그러니까, 이 사전에서는 '억장'을 한자 '臆腸'으로 표기하지 않고 '가슴'의 속된 말이라 풀이하여 고유어로 취급하고 있으며 '억장이 무너지다'라는 관용어는 '가슴'을 뜻하는 '억장'에서 온 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니 '억장1'과 '억장(億丈)2'은 전혀 다른 명사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억장(億丈)'의 원말이라는 '억장지성'을 사전에서 찾으니 그런 단어는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많은 글에서 '억장이 무너지다'라는 말의 '억장'을 '억장2[億丈]'으로 보고 이를 '억장지성(億丈之城)'의 준말이라고 설명한다. '일억 장(丈: 약 3미터)이나 되는 높은 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스러울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억장지성'을 '억장'으로 줄여 쓴다는 자체가 어색하기만 한데, 사전에도 없는 '억장지성'이란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자성어라면 고전에도 더러 쓰여졌을 것인데도 도무지 용례를 찾을 수 없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족보를 알 수 없는 말이다.

 

게다가 '억장(億丈)'이란 말의 언어적 감성은 '억장이 무너지다'라는 말에 그리 어울리지 않은 말이다. 일상인에게 '일억장이나 되는 성'은 생활 감정에도 맞지 않는 낯선 말일뿐더러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절망적으로 무너지는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억장이 무너지다'는 그리 공감되지 않는 용어라 생각된다.

 

 

 

수백 년의 한자 문화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일상적으로 '간담(肝膽)이 서늘하다'나 '비위(脾胃)에 거슬린다' '복장(腹臟) 터진다'처럼 일상 속에서 겪는 심리를 엄연히 몸통 속 장기를 나타내는 한자어로 즐겨 표현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싶다.

 

한자어일 것 같지 않은 말조차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한자어로 표기하는 국어사전에서 웬일인지 '억장(臆腸)'이라는 한자어는 굳이 외면하고 있다. '가슴 억(臆)' 자도 '창자 장(腸)' 자도 예로부터 빈번히 사용된 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심청전 등 우리 고전에는 '억색(臆塞)'이란 단어를 종종 만날 수 있는데, 이는 "가슴이 막힘"을 나타내며 억울하거나 원통한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억장이 무너지다'라는 말도 '몸통 속 모든 장기가 다 무너지는 듯 절망스럽다.'는 뜻을 표현한 관용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