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11)

모산재 2012. 4. 2. 00:58

 

다음 글은 제주 4.3의 아픈 진실을 공유하기 위하여 굴렁쇠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143059을 퍼온 것입니다. 1~10회의 글은 '한국근현대사 자료' 카테고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 4.3을 더 잘 알려면 굴렁쇠님의 홈페이지(http://blog.ohmynews.com)를 방문하시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 제주 표선면 가시리 마을. 4.3의 아픔을 파묻은 채 59년의 세월을 버티어 왔지만 그날의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있다. 중산간마을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비운의 마을. 이 마을에서 무려 500여명의 무고한 양민이 학살됐다.

 


폭염도 이 슬픔을 녹일 수 없다. 쏟아지는 땀도 이 노여움을 대체하지 못한다. 중산간마을을 찾아다닐 때마다 가슴에, 머리에, 지도 한 장 움켜쥔 손끝에 걸려있는 건 스산한 서러움. 길을 헤맸다. 도무지 학살의 현장을 찾을 수 없었다. 가시리 마을 어디에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가고 또 가고...오기가 바닥날 무렵, 그늘이 좋은 팽나무 아래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는 어르신들을 만났다. 길을 물었다. 헤매 다닌 지 꼭 4시간 만에 그 통한의 현장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버들못은 그렇게 찾아냈다. 가시리와 표선리 사이 역지동이란 작은 마을 변두리에 있었다. 다시 버들못에서 나와 표선리 마을로 내려왔다. 낯설게 변해 있었지만 곳곳에 옛 정취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저물 무렵엔 표선초등학교와 표선해수욕장을 찾았다. 이번에 다루게 될 제주 4.3 학살의 현장들이다. 옷이 흠뻑 젖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 서글픈 여행은 끝이 없다. 가는 곳마다 아픔이 밀려왔다. 나의 여름은 그렇게 시작됐고, 이제 끝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도피자 가족에게 씌워진 대살(代殺)

1948년 11월 17일 제주섬에 불법적인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빨갱이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은 공포와 죽음의 마을로 변했다.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은 그렇게 전개됐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이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이승만 정부가 미쳐 날뛰는 살육작전으로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다. 해안 마을에 소개(疏開)된 섬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 하든 언제 끝날지 모를 학살의 모진 광풍을 피해야 했다.

실날같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는 피난민이 줄을 이었다. 엄동설한 한라산 속에서 짐승같이 숨어 지내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되거나 형무소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 진압군(군경토벌대)은 소개되어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청년이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학살했다.


 

 
▲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다.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온 수용자들.(1948. 11)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된 섬사람들은 해안마을 주민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주민들을 한곳에 집결시키고 일일이 호적과 대조하며 도피자 가족을 찾는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런 날이면 나이 든 부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운명은 도피자를 대신하여 서천꽃밭으로 날아갔다. 섬사람들은 이를 '대살(代殺)'이라고 불렀다.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 기가 막힌 신조어다.

총살은 진압군 주둔지인 해안마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도피자 가족을 겨눈 총부리는 날을 거르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이 입산한 집안의 어른이나 여인은 숨어 지내는 것 자체가 부들부들 떨며 지내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통곡의 나날들. 어떻게 이런 생지옥이 평화롭기만 한 섬마을에서 자행됐단 말인가.

 

제주 표선 가시리 도피자 가족 학살사례

군경토벌대는 순하디 순한 한라산 자락 노루떼를 사냥하듯 중산간마을에 숨어 있는 섬주민들을 찾아내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서귀포시(옛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 1948년 11월 15일 새벽, 진압군은 이 마을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주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그들은 이미 짐승과 구별할 수 없었다. 총성이 울리면 비명이 뒤따르고, 그 자리엔 주검이 하나 둘 늘어났다. 아우성이 온 마을을 휘감아 도는 동안 1948년 이 마을의 겨울은 그토록 붉을 수가 없었다.

이날 희생된 주민들은 30여 명. 젊은이들이 급히 피신한 가운데 마을에 남아있던 노인과 어린이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이 가운데 김수계, 김인하, 김정숙, 김호직, 안만규, 오경생, 오윤부, 오희백, 정재병, 정종언은 모두 60대에서 80대 어르신들이다.
이날 안흥규(작고)는 급히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군인들이 빠져나간 후 집으로 돌아온 안씨는 온 가족이 몰살된 처참한 현실 앞에서 넋을 놓아야 했다. 고신춘(여·42) 강매춘(여·37) 안재원(남·20) 안영순(여·19) 안재순(여·15), 그리고 호적에 이름도 못 올린 어린이 안일진·안옥희·안옥순 등 안씨의 가족 8명이 안씨의 누이 안규반(40대)과 그녀의 자식들인 강재호(남·12) 강순이(여·7) 성명모름(4) 등과 함께 가까운 숲에 숨어 있다가 12명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김인하는 손녀(3살)와 손자(1살)를 데리고 급히 냇가로 피신했다. 굴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굴 밖으로 새어 나간 아기 울음소리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진압군은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노약자들까지 무참히 희생되는 상황에 이르자 주민들은 절망했다. 하늘이 노란 건지 빨간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산으로 오르지도 못하고 해변으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마을에 머물며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11월 22일경. 이 마을에 "해변마을 표선리로 소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연고를 찾아 표선마을이나 토산마을로 소개를 갔다. 하지만 몇몇 주민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해안마을로 선뜻 내려가지 못했다. 하산 기회를 놓친 주민들은 들녘을 전전하다 진압군의 수색작전에 발각되었고, 결국 죽음의 강을 건넜다.

 

 

 
▲ 이곳 '버들못' 일대에서 가시리 주민 76명이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한꺼번에 집단 총살당했다.

 


소개령에 따라 표선마을로 내려간 주민들은 표선초등학교에 수용됐다. 수용생활을 한지 한 달여 지난 1948년 12월 22일. 진압군은 주민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죽음의 그림자가 싸늘하게 그 뒤를 따랐다. 군인들은 일일이 호적과 대조하며 가족 전부가 소개 온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을 나누어 세웠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이른바 '도피자 가족'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렸다.

죽음의 딱지를 떼지 못한 주민들은 속칭 '버들못' 윗쪽 약 200m 지점에 있는 밭으로 끌려가 76명이 한꺼번에 집단 총살당했다. 자식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60대 이상 노인들이 대부분 희생됐다. 이날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오국만 할아버지는 자신도 겨우 목숨을 구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군인들이 많이 와서 '모두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 이틀 날입니다. 군인들은 주민들이 모이자 '호적상 모든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한 쪽 옆으로 나가서 서라!'고 하여 나누자 그렇지 않은 가족들이 운동장 가운데에 서게 됐습니다.

 

우리는 형이 행방불명된 상태라 도피자 가족으로 운동장 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또 '젖먹이 아기 엄마와 15살 미만은 나오라!'고 했습니다. 난 당시 16살인데 아버지는 사태를 예감했는지 당초 수용소에 들어갈 적에 제 나이를 14살로 낮춰 장부에 기록했습니다. 그 덕에 전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 76명이 지금의 변전소 옆 밭에서 집단 총살을 당했습니다. 당시엔 시신에 흙만 덮어뒀다가 1년 후 마을이 재건될 때에 시신을 묻었습니다. 중부님은 아버지의 한복 두루마기 안의 담뱃대로 확인했습니다." (오국만, 남, 증언 당시 70세, 표선면 가시리, 2002. 5. 29 채록 증언)



 
▲ 표선마을로 소개간 주민들은 표선해수욕장 '당케' 부근 백사장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해수욕장에 또렷이 새겨진 이 발자국에도 아픔의 역사가 묻어 있을까.

 


진압군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학살극은 멈추지 않았다. 표선마을로 소개 간 주민들은 '당케' 부근 백사장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진압군은 총살을 하면서 주민들은 물론 죽어가는 이의 가족까지 앞세워 '만세!'를 외치고 박수를 치게 하는 등 충격적인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럴 수 있을까. 미쳐버린 세월, 인간 백정의 나라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이승만 친미반공정권은 이처럼 억울하게 죽어간 제주민중들의 슬픈 피를 삼키고 탄생한 미치광이 야만집단이다. 우리 역사는 아직도 이 학살자를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겁에 질려 소개도 못 가고 산에도 오르지 못한 채 들녘을 방황하던 주민들의 희생도 컸다. 가시리 주민들 사이에서는 토벌대에게 희롱 당하다 아기와 함께 죽어간 한 여인의 이야기가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대하실록 제주민중운동사 <4.3은 말한다>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토벌에 참여했던 변윤길 할아버지의 기억을 빌려 전하고 있다.

 

군경토벌대는 토벌 갈 때 늘 성읍리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앞장세웠습니다. 하루는 가시리에 갔을 때 여러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군인들은 즉각 따르륵 총을 쏘았습니다. 산에 오르지도 못한 채 숨어 지내던 노인과 부녀자들이었지요. 결과적으로 산에 오른 사람은 살고, 마을에 남았던 사람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아무개 경찰은 참으로 몹쓸 짓을 많이 했어요. 그는 한 젊고 예쁜 여자를 잡아와 '옷을 벗어 저기까지 뛰어갔다 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아기까지 업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지만 그 경찰은 총을 쏘았습니다. 쓰러진 그녀 위에서 아기가 울어대자 한 군인은 '아기 혼자 여기 내버려 봐야 살 수 없다'며 아기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변윤길, 남, 증언 당시 81세, 표선면 성읍리,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4.3 이전까지 3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시리에서 무려 500여명의 양민이 희생됐다. 끔찍한 참극이었다. 어느 집 하나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다. 국가는 이렇게 제주섬을 학살했다. 희생의 87%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졌다. 군인과 경찰, 그들의 꼭두각시 서북청년단에 의해 제주섬은 온통 피에 젖었다. 제주 중산간마을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이 가시리의 학살은 59년이 지나도 그 공포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 4.3 당시 소개령에 따라 표선마을로 내려온 주민들을 수용했던 표선초등학교. 이곳에서 주민들은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버들못' 인근 학살현장으로 떠났다. 고목이 된 팽나무는 그 공포의 시간을 생생히 지켜봤을 것이다.

 

 


59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제노사이드(Genocide) 범죄

피의 섬 제주는 선택된 운명이었는가. 이런 반인륜적인 대량학살 범죄는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보편적이며 일상적인 행위였다. 6.25 당시 북한에서 저질러진 미군의 학살만행, 그리스내전, 베트남전쟁, 라오스 및 캄보디아 비밀전쟁을 비롯하여 최근의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민중학살 만행은 2차대전 후 주로 제3세계에서 저질러졌다. 이승만 또한 6.25전쟁을 전후하여 전개한 '청천벽력작전' 등으로 수십만명의 양민이 죽어갔다.

제주 4.3의 제노사이드(genocide : 대량학살)는 초토화작전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의 하수인 집단인 경찰과 군인 및 서북청년단을 고스란히 인수받은 이승만 정권은 해안선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지역'으로 지정하여 1948년 11월부터 무자비한 대량살육작전을 감행했다.

그것은 미국과 이승만 양자의 필요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었다. 미군정의 경우 5.10선거를 실시하여 남한에 이승만 단독괴뢰정권을 세워 조선의 분단을 못박고 유엔에 공인시키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다. 미국이 한반도에 반공의 방벽을 튼튼히 쌓기 위한 세계지배전략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그래서 딘 군정장관과 그 하수인 조병옥은 4.3항쟁을 '제주도 밖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또 '소련연방화 책동'이니 '국제공산주의자와의 연계' 등으로 매도하고 이를 빌미로 강경진압을 지시했다.

이승만의 경우도 똑 같다. 제주4.3민중항쟁으로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됨에 따라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됐고, 여순항쟁이 발발하여 이승만 정권의 생존 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고 있었다. 이것은 유엔의 정부승인을 어렵게 하는 변수였다. 또한 김구·김규식 선생 등이 지도하는 조국통일운동이 거세져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이 상실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다급해진 이승만 정권은 5.10 단독선거를 마무리 하여 정권 기반을 강화하고, 한반도를 이념 대결의 장으로 몰고 갔다. 그 결과 평화로운 제주도는 '피의 목욕통'이 되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어둠이 그대로 뒤엉켜 있는 제주 4.3.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제주민중들, 특히 4.3 유족이나 체험자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불안과 공포와 한이 알알이 박혀 있다. 이 잘못된 역사에 대한 복원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 조국의 부끄러움이다.

제주 4.3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은 오늘도 약소국 민중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제2, 제3의 4.3 학살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을 향한 우리의 분노가 어찌 한순간의 감정일 수 있으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는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굴렁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