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남춘천 실레마을 김유정 생가, 김유정 문학촌

모산재 2011. 8. 14. 00:05

 

진작에 찾았으면 좋았을 걸...

 

경춘선 기차가 사라지고 전철이 개통된 다음에야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고향을 찾는다. 

 

전철 강촌역에서 잠깐이면 도착하는 김유정역. 춘성군 신남면을 지나는 역이라 '신남역'이라 불리던 것이 2004년 연말에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작가의 이름으로 된 하나밖에 없는 역이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은 역사가 눈 앞을 가리고 그 너머로 신남의 마을 풍경이 보인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역사는 우아하고 정갈한 한옥의 아름다움을 잘 살렸는데, 서민적이고 향토성 짙은 김유정의 소설적 분위기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게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

 

소박하고 인정미 물씬 풍기는 초가집의 분위기를 살리는 디자인이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역사를 나가 왼쪽으로 돌아서면 멀리 실레마을이 보이고, 넓은 밭을 끼고 김유정 생가로 길이 이어진다. 실레마을은 30편의 김유정 소설 중 12편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콩, 옥수수, 고추 등을 심어놓은 너른 밭이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왼쪽으로 김유정이 야학을 펼치던 움막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뒤편으로 멀리 연무(煙霧)에 잠겨 어렴풋이 보이는 산이 김유정 소설이 주요 무대인 금병산(진병산)이다.

 

 

 

 

김유정의 수필 '5월의 산골작이'에는 고향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움막 야학집

 

 

 

 

그리고 금방 아담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유정의 생가에 도착한다.

 

 

 

 

김유정 생가는 조카 김영수와 금병의숙 제자들이 고증을 해 주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집 안 맨 아래 낮은 터에는 작은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다. 원래 있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배려한 것이다.

 

 

 

뜰 곳곳에는 범부채, 층층이꽃, 도라지, 양장구채 등 꽃들이 피어 있다.

 

 

 

초가집으로 지어진 생가 전경

 

안채는 강원도 가옥에서 일반적인 ㅁ자형 집이다.

 

 

 

 

김유정은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10대손이라 한다. 9대조는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다고 하니 제법 떵떵거리는 집안이었다.

고조부 때 춘천 실레마을로 들어와서 살게 되었고 증조부는 학당을 열어 자제들을 교육하였으며, 할아버지는 춘천 의병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6천 석의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문가였지만 할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운다. 김유정이 일곱 살 되던 해인 1914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 해 겨울 서울 운니동(진골)에 대저택을 마련하고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춘천집은 그냥 두고 소작농이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이후 유정의 형(유근)이 가산을 탕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가 내부 모습

 

 

 

 

 

기념관 앞의 김유정 동상

 

 

 

 

김유정 동상은 너무 높은 기단 위에 입상으로 세워져 있어 바로 앞에서 바라보면 상체가 지붕 위로 성큼 올라서 있다. 그래서인지 마치 개화기와 일제시대 계몽운동의 선각자나 항일 독립투사 상을 세운 듯하다.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 돌아와서 잠시 야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봄봄이나 동백꽃 등의 향토적이고 서민적인 체취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이미지이다. 그냥 낮은 좌대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의 동상이었다면 더욱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가를 추앙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친근한 모습을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기념관 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안회남(안필승)에게 쓴 편지글이다. 폣병을 앓아 몸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가 두 살 연하의 문우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너무도 절박한 편지글이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그러나, 이 편지를 쓴 지 열흘만에 그는 죽고 만다. 6천 석의 부호였던 재산을 형이 탕진해 버려 살아나기 위해 닭과 뱀을 고아 먹을 돈 100원을 마련코자 했던 필사의 몸부림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리고 또 하나 내 눈을 붙든 것은 그가 사랑했던 두 여인의 초상이다.

 

두 여인의 이름은 박녹주(朴綠珠), 박봉자(朴鳳子).

 

 

 

 

적지 않은 남성들이 어머니를 구원의 여인상으로 여기는데, 일곱 살 어린 나이로 어머니를 여읜 김유정에게는 그것이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의 미완성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는 이러한 그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다.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그런 김유정에게 첫 사랑 여인이 나타났으니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만난 판소리 명창 박녹주이다.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반하여 사랑에 빠진다. 네 살 연상인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혈서에다 협박까지 동원하는 광적인 구애를 지속했으나, 박녹주는 유정을 끝내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의 소설 <두꺼비>에는 박녹주에 대한 김유정의 마음이 여실하게 그려져 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 본, 그나마 잘낫으면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것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 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의에 빠진 유정은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온다. 금병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 박녹주(1906~1979)

판소리 명창.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 출생. 12세 때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 정정렬, 유성준, 김정문 등에게 배웠다. 1928년 콜롬비아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빅터레코드사·오케이레코드사·태평레코드사 등에서 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1937년 송만갑·이동백(李東伯)·오태석(吳太石) 등과 함께 창극좌에 들어가 활약했다.

8·15해방 후 여성국악동호회·국극사를 조직해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인 동편제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박녹주는 죽기 3년 전 <뿌리 깊은 나무>(1976년 6월호)에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란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당시에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편지질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1973년에야 <문학사상>에 공개된 유작 <두꺼비>는 박녹주에 대한 유명한 짝사랑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여인은 박봉자.

 

1936년 여름, 잡지 <조광>에 '사랑의 편지'란 공동 제목으로  (5월 잡지 <여성>에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란 공동 제목으로) 김유정과 함께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은 박봉자라는 여인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답장은 일절 없었다. 이 여인은 바로 '떠나가는 배'의 시인 박용철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김유정과 함께 후기 구인회 멤버가 되어 잘 알고 지내던 탐미주의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함으로써 김유정을 또 한번 좌절에 빠뜨렸다.

 

그녀는 나중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유정의 편지는 서른 통 정도 받았다. 먼저 오빠의 손에 겉봉이 뜯긴 다음 내가 편지를 읽었다. 지금 여성들은 다르겠지만, 당시는 아무리 신여성이라 해도 김유정 같은 뜨거운 구애에는 침묵을 지킬 도리밖에 더 있었겠는가?

 

 

 

기념관을 나오면 맞은편에는 김유정이 실레마을에 돌아와서 야학을 하였다는 움막 야학터를 복원하여 놓았다.

 

 

 

 

 

이제 '산골나그네', '봄봄', 동백꽃', '만무방' 등 김유정 작품의 흔적을 찾아 금병산 자락을 올라 보기로 하고 뒤편 산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산책길만 있을 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곤란한 것은 봄날의 점순이와 봉필 영감을 만나고 싶은데, 쨍쨍 내려쬐는 한여름 대낮의 따가운 햇볕을 피할 곳이 없는 것.

 

이른 봄날에 왔더라면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떠다밀며 '고만 정신이 아찔'하게 노란 동백꽃 속으로 파묻히던 장소가 어딜까 살펴보는 재미라도 있으련만...

 

그냥 돌아서고 만다.

 

 

↓ 금병산자락에서 내려다본 김유정 생가 전경

 

 

 

 

 

※ 김유정 문학촌, 실레마을 안내도

 

 

 

 

 

 

 

 

 

 

■ 김유정의 삶과 문학

- 김유정 문학촌 홈페이지(http://www.kimyoujeong.org/) 글 발췌 및 편집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주 횟배를 앓는 등 몸이 허약하였다. 말더듬이어서 늘 과묵했는데 해학으로 가득찬 그의 작품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 처분을 받았다. 그때 당대 명창 박녹주를 만나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김유정은 고향에서 가난하고 순박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고향 마을에 머물었던 기간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불과 1년 7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특히 여기저기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와 친해지는데 그의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등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실화적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마시는 술로 치질과 늑막염을 앓으면서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런 한편 고향집 언덕배기에 움막을 짓고 마름집 아들이었던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다음 해(1931년) 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에 입학했으나 곧바로 퇴학당하였다. 매형의 주선으로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다 광부들과 어울려 술만 마시다 건강이 더 악화한 상태로 몇 달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온다. 이 때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김유정은 야학 일에 전력하며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다음과 같은 농우회가가 전해진다.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

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

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그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다.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김동리가 쓴 '김유정 기적비'와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금병의숙터에는 현재 경로당이 지어졌다.

 

 

 

김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고 한다.

 

주변 동네 청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라는데,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당시 제자들에 따르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

 

어떻든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촌 청년들을 깨우치는 일에 어느 정도 신명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가 들병이를 찾는 것도 그렇게 가슴이 허망하게 비어드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그는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가 길가 오막살이 돌쇠네 집에 들러 돌쇠 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이 그의 처녀작이 된 <산골 나그네>인 것이다. 그리고 실레 마을에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먹으며 욕을 잘하는 박봉필이란 사람을 관심깊이 살펴보곤 했다. 나중에 그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쓴 작품이 바로 <봄봄>이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산골> <동백꽃> <만무방> <금 따는 콩밭> <안해> <가을> <두포전> 등이 모두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산골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치열한 작품활동을 벌인다.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필승)에게 쓴 편지를 마지막으로, 1937년 3월 29일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