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고구려

고구려, 백두산 순례 (7) : 탈북자와의 만남, 두만강 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모산재 2007. 1. 6. 13:19

 

고구려, 백두산 순례 (9)  탈북자와의 만남, 두만강 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2006. 08. 16

 

 

탈북자와의 만남

 

용정을 돌아보고 다시 연길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다. 식사 뒤 잠깐 쉬는 시간에 버릇처럼 주변 풀밭을 살핀다. 어떤 생명들이 자라고 있는지...

 

 

 매듭풀 

 

 

 

 

아마도 큰조뱅이(엉겅퀴아재비)인 듯...

 

 

 

 

양지꽃속의 풀꽃, 뭘까...

 

 

 

 

 

그렇게 풀꽃들을 찾고 살피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저 멀리에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내게로 다가와서 말을 건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쭈빗쭈빗 말을 건네는 모습이 조심스럽다.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곳까지 온 탈북자였다. 형제가 함께 왔다고 했다. 부드러운 인상이 거친 삶을 산 듯하지는 않은데, 인생 후반에 탈북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을 겪었던 모양이다. 운남성까지 가려고 한다는데(거기서 또 미얀마나 타이 국경을 넘어서 남한으로 들어오는 길을 찾으려는 듯..), 어쩌자는 걸까. 끼니도 제대로 때울 수 없는 빈 주머니로... 무작정 강을 건너와 수중에 가진 돈이라고는 없어 이렇게 멀리서 눈치를 살피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면 접근해서 구걸하는 모양이었다. 강을 거너온 그 용기와는 다르게 몹시 수줍음을 타는 그는 가까이에 다가온 나에게만 손을 내밀었을 뿐 저 쪽에 있는 우리 일행에게는 접근하려고조차 하지 못했다.

 

 

 

 

막막해진 나는 몇 가지 간단한 대화만 나누다가 끼니나 챙기시라고 얼마되지 않는 돈을 건네고 돌아섰다. 그는 고맙다고 몇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와서  그를 보니 그는 우리쪽으로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도 그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다가 카메라를 찾아들고 셔터를 눌렀다. 그가 앞으로 어떤 운명을 겪을지 다시 한번 마음이 막막해지는데, 버스는 두만강을 향해 동북쪽으로 달렸다.

 

 

짝퉁 도문에서 바라보는 북녘땅 

 

연길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서 도문에 도착한다. 현재 인구 15만의 국경 도시인 도문은 1910년대까지만해도 중국 연길현에 속한 작은 자연 부락이었다.1913년 연길이 처음 현으로 지정됐을 때 도문은 회막동으로 불렸는데 조선족들과 한족들이 땅을 개간하면서 이주를 시작해 1925년 20여호에 불과했던 마을이 1931년에는 100여호 규모로 커졌다. 연길현 당국은 1933년 6월 1일 이곳의 ‘회막동’을 ‘도문’으로 바꾸고 이듬해 도문시(圖們市)로 승격시켰다.

 

간도 영유권 분쟁의 핵심인 '토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란을 이렇게 두만강가에 도문시를 만듦으로써 '토문강=두만강'임을 기정사실화하려는 노림수가 깔렸을 것이다. 1712년(조선 숙종 38년)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土門江)을 두고 중국측은 두만강, 한국측은 두만강과는 별개인 송화강 지류라고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압록강을 앞에 둔 집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만강을 앞에 둔 도문도 남북분단을 관광상품으로 먹고 사는 국경 도시였다.

 

 

고려문

 

강 건너편은 북한의 남양, 옛 이름으로는 온성이다.

 

 

 

 

두만강 가에는 여러 대의 뗏목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장삿속이야 어떠하든 사람들은 삿대질로 미끄러져가는 뗏목에 앉아서 북녘땅 가까이에 다가서보며 50년 분단의 세월에 대한 여러 상념에 빠져 들어 본다. 

 

 

 

 

 

강물은 이미 들었던 바대로 더럽다고 할 정도로 탁하다. 그래도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똥물'도 아니고 '똥물' 같은 분단 현실도 아니다.

 

도사님과 나, 그리고 몇몇 동행들은 뗏목을 타는 사람들과 건너편 북녘땅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사서 마신다. '막걸리'라고 써 놓아서 막걸리인 줄 알았는데, 색깔만 막걸리지 맛은 술맛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엉뚱해서 거북하기만하다. 그래도 명태를 안주로 해서 막걸리 마시는 기분에 젖어들어 본다.

 

 

 

 

똘똘하고 너무나 열성적인 가이드 아줌마(김향란)와 기념 사진

 

 

 

 

사람들이 뗏목을 즐기는 시간 혼자 강변을 따라가며 풍경을 담는다.

 

자주황기

 

 

 

 

 

 

 

 

두만강변에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북한의 남양시

 

 

 

 

 

 

 

 

 

 

저 멀리 강이 굽어도는 곳이 지도에서 두만강이 동남쪽으로 꺾이는 곳으로 우리 땅의 가장 북단에 해당되는 곳이다. 북위 43도 00' 39"

 

 

 

 

남쪽으로 토문-남양을 연결하는 철교가 보인다.

 

 

 

 

 

다시 철교 쪽으로 이동하여...

 

붉은 페인트를 칠한 곳은 중국 땅

 

 

 

 

푸른 페인트를 칠한 곳은 북한땅

 

 

 

 

돈(인민폐 50원?)을 내면 저 다리의 중간까지 걸어가 볼 수 있다.

 

 

 

 

 

 

두만강을 보고 돌아서는 마음은 개운치가 않다. 저 철길을 건너와서 연길과 용정을 찾고, 그리고 백두산을 올라야 할 것을...

 

두만강에서 북녘땅을 한동안 건너다보며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연길로 돌아온다. 연길 공항을 지나치며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암흑기 독립운동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이 고난의 땅은 돈푼이나 있는 남한 사람들에게는 관광지일 뿐, 이곳 사람들의 삶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두만강 건너 북한과 북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이곳을 방문하는 남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항일민족운동이나 민족통일이란 말 속에 담겨 있던 '민족'이라는 성스러운 의미는 점차로 빛바래지고 있고, 그 자리에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영토적 욕망이 슬그머니 들어서고 있다.

 

'한라산'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바로 앞에 있는 거리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많이 타는 곳이라 거리도 깨끗하고 건물도 높이 솟았다.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하고 있고, 한국식 아파트는 고급 아파트로 인기리에 분양되고 있다 한다.

 

 

 

 

 

이곳의 교통 수단에 대해 가이드가 했던 우스개말이 떠오른다.

 

자가용은 '도시의 아가씨', 자전거는 '도시의 쥐', 버스는 '도시의 아줌마'. 그리고 오토바이는 '도시의 미꾸라지'라 부른단다. 교통 수단에 담겨 있는 계층적인 의미를 상징화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과부차'라고도 부른단다. 처음 오토바이를 샀던 8명의 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5시 40분 심양북역을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고구려, 백두산 순례는 이로써 사실상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6박7일의 일정 중에서 이곳에 도착해서 가진 일정은 3일밖에 되지 않아 참으로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6인1실의 객실에서 하룻밤을 새며 13시간을 걸려서 가는 기차 여행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지금까지 바쁜 일정으로 함께 할 시간이 없었던 일행은 저마다 객실에 자리를 만들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정담을 나눈다.

 

 

 

 

어느덧 해는 지고 하늘은 황금빛 노을로 타는데, 산과 마을은 어둠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