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예쁜 꽃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산재 2006. 3. 23. 19:48
바람처럼 맑은 햇살에 이끌려 정오도 되기 전에 후딱 점심을 먹어 치우고 집을 나선다. 세계야구대회 일본과의 준결승전이 막 시작되어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지만 내 마음을 붙들지는 못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간만 나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버릇이, 이젠 중독이라 할 정도가 되었다. 계절이 순환하며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생명 세계에 대한 한없는 집착,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지 나는 모른다. 광신도에게 어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설득도 소용없듯, 생명이 만드는 세계에 흠뻑 빠진 내게 어떤 유혹도 산과 들의 유혹을 넘어서지 못한다.

집을 나서자마자 기대하지도 않은 곳에서 꽃을 만난다. 바로 이웃하고 있는 아파트 화단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진달래꽃을 본 것이다! 집을 나서자마자 바로 꽃을 만났으니, 너무 신나 셔터부터 누르고 본다. 생각해보니, 저 남쪽 내 고향에서도 4월에 들어서서야 진달래꽃이 폈는데, 이제 3월 중순 끝무렵 꽃이 피었으니, 일러도 많이 이른 편이다. 아파트 단지가 따뜻한 탓도 있겠지만 지구 온난화의 한 징표인 듯해 마냥 반가워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 진달래꽃. 앙증스런 작은 꽃봉오리에도 "그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절로 떠오른다.
ⓒ 김희년
'진달래'란 이름은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말이고, 내 어릴 적 고향에서는 '참꽃'이라고 불렀다. 참꽃은 개나리와 같은 시기에 안산(나즈막한 앞산을 일러 이렇게 불렀다)을 물들였던 꽃이다. 복숭아, 살구꽃과 함께 절로 고향의 분홍빛 옛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의 색채이다. 또한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봄의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따먹었던 간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유신 독재 시절, 4월이면 4·19에 쓰러져간 영령들을 그리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절절하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진달래'였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 시조, 한태근 곡)


4·19 혁명을 20여년간 질식시켜왔던 유신 독재, 최루탄이 폭죽처럼 터지던 교정, 끌려가던 학우들, 그리고 그 자리에 피었다 지던 진달래꽃….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대모산을 넘어간다. 지리적으로도 서울의 가장 남쪽이지만, 제아무리 봄이라도 품 넓고 따뜻한 대모산을 비켜서는 서울에 입성할 수는 없으리라. 수서역에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생강나무 노란 꽃들이 군데군데 산 속을 환히 밝히고 있다. 아직 다른 나무들은 겨울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듯한데, 생강나무 노란 꽃과 귀룽나무로 보이는 푸른 새싹이 숲속을 봄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 숲속에서 초록빛 새싹을 가장 먼저 틔우는 귀룽나무.
ⓒ 김희년
귀룽나무의 푸른 잎의 싱그러운 생동감! 이른 봄 계곡이나 물이 있는 저지대 숲에서 가장 일찍 새싹을 틔운다는 귀룽나무는 나른한 봄날 기운을 북돋워 준다 하여 동네 입구나 대문 앞 연못가에 심기도 하는 나무이다. 가지를 꺾으면 나는 고약한 냄새로 옛날에는 파리를 쫓는데 쓰기도 했다고 한다.

산등성이 군데군데 심어진 오리나무가 수꽃들을 탐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다. 누에처럼 통통하게 늘어진 황금빛 이삭이 수꽃이고, 바로 위에 아주 작은 고동색으로 뾰족이 달린 것이 암꽃이다. 나무 노래에서도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고 했는데, 산림녹화용으로 오리 간격으로 심어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믿거나 말거나인 듯하다. 땔나무로는 소나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화력도 약하고 다른 면으로도 그다지 쓸모가 없어 대접을 받은 나무는 아니었다.

▲ 오리나무. 누에처럼 길게 늘어진 수꽃과 그 위에 작게 돌출된 암꽃이 대조되어 눈길을 끈다.
ⓒ 김희년
마을 옆 무덤들이 있는 양지바른 언덕엔 무릇이 무더기로 싹이 자라고, 꿩의밥도 검붉은 이삭을 달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봄 언덕에서 저 열매를 손바닥에 얹어 놓고 싹싹 부벼서 꺼풀은 입 바람으로 후후 불어 날리고, 알맹이를 입 안에 톡 털어 넣어 먹기도 했다. 꺼끌꺼끌한 게 무슨 맛이야 있었겠느냐마는, 간식이라곤 없었던 봄날의 시골 아이들에겐 삘기와 함께 심심풀이 먹을거리가 되었다.

▲ 꿩의밥. 무덤처럼 볕 잘드는 잔디밭 언덕에 잘 자라는데, 이삭을 부벼서 먹기도 했다.
ⓒ 김희년
무덤이 있는 언덕을 유심히 살피다 보니, 잔디밭에 왁자하니 꽃을 피우고 있는 풀이 보인다. 금잔디 꽃은 분명 아닌데, 풀잎은 잔디를 닮았다. 꽃 모양만 봐서는 새포아풀인 듯한데, 한해살이로 뿌리줄기 없이 포기 단위로 자라는 새포아풀과는 달리, 잔디처럼 뿌리줄기가 넓게 퍼져 자라고 있다. 아마도 향모인 듯하다.

▲ 향모로 보이는 풀. 양지바른 잔디밭에 잘 자란다.
ⓒ 김희년
낮은 지대의 잔디밭이나 풀밭에서 자라는 향모(香茅)라는 풀은 건조하면 향기를 풍겨 '향기로운 띠풀'이라는 뜻의 이름을 얻었다. 드문드문한 잎사귀 사이사이 이삭처럼 꽃피어 있는 모습이 소박하고 편안하다.

묏등 언덕 아래엔 양지꽃이 활짝 피었다. 지난 일요일엔 한두 송이 핀 것도 보기 어려웠는데, 벌써 꽃잎을 땅에 떨어뜨린 녀석도 있다. 볕 잘 드는 산기슭이나 언덕, 밭두렁 등에 잘 자라는, 이름 그대로 양지를 좋아하는 꽃이다.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뽕구지꽃이라는 귀여운 별칭도 가지고 있다.

▲ 양지꽃. 봄볕의 기운에 민감한 꽃인데, 벌써 지는 녀석도 있다
ⓒ 김희년
마을을 돌아가자 밭 언덕에서 어린 자매 둘이 다정히 봄 햇살을 받으며 봄나물을 캐고 있다. 꽃들도 꽃들이지만 이렇게 나물을 캐는 아이의 모습이야말로 꽃 중에 꽃이다.

▲ 나물 캐는 꼬마 소녀들. 캐는 것은 나물만이 아닐 것이다.
ⓒ 김희년
이렇게 자연을 경험하고 느끼며 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놀토'라는 말까지 들먹이며 아이들이 토요일에 노는 것을 걱정하며 학력에만 집착하는 인터넷 기사들을 보며 나는 댓글까지 단 일이 있다.

"제발 아이들 좀 놀게 내버려둡시다!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입시 지옥에 끌어넣어야만 직성이 풀릴까요?"

바구니엔 냉이와 돌나물이 가득하다. 바구니엔 담긴 게 어디 나물뿐이겠는가! 맑은 바람과 따스한 햇살, 그리고 생명의 경이로움은? 돌나물을 뿌리채 캐 담는 것이 보여 줄기만 뜯어 담는 것이라며 시범을 보여줬더니 발그레한 볼에 방긋 미소를 띤다. 쑥이 많이 자란 곳을 알려줬더니 저렇게 쪼그리고 앉아 쑥을 또 캐려고 한다. 다시 줄기에서 잘라내는 법을 알려 준다.

▲ 풀빛 짙어 오는 밭 언덕. 꽃샘추위 지난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벌써 봄이 깊어진 것일까?
ⓒ 김희년
들 언덕과 이어지는 마을로 들어서자 봄빛이 완연하다. 꽃샘추위가 지나간 지 불과 한 주일 차이건만 들 언덕엔 풀빛이 짙었다. 들판에는 농부들이 과수를 돌보고 있다. 봄의 기운이 대지를 숨쉬어 풀꽃들은 하루가 다르게 생명력을 분출하고 있다.
짙푸른 언덕 아래를 지나가자니 냉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줄기도 쑥쑥 자라올라 한 자 남짓이나 되어 보인다. 가장 흔한 꽃, 그래서 민중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꽃, 그러면서도 꽃 이상의 삶으로 다가서는 생명이 냉이였다.

▲ 냉이. 키가 쑥쑥 한 자 높이만큼이나 자랐다.
ⓒ 김희년
냉이 꽃 핀 바로 위 언덕엔 민들레가 드문드문 황금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 가을 홀씨를 날려 보낸 시든 꽃받침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또 다른 이름인 앉은뱅이꽃, 말 그대로 잎사귀는 땅에 바짝 붙여 앉은뱅이 자세인 채로 꽃 또한 짧은 꽃대 끝에 화려하게 피었다. 메마른 땅, 기름진 땅이건 가리지 않고 마구 피어나는 민들레의 생명력, 그래서 가장 흔한 꽃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이 땅덩이를 일구고 지켜 온 키 작은 민중들처럼….

▲ 민들레꽃.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들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생명력이 아름다운 꽃이다.
ⓒ 김희년
풀과 꽃을 찾아 나선 길이지만, 사실 출발할 때의 내 마음은 봄날씨처럼 화창하지 못했다.

며칠 전 대기업 노조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당하다 해고되어 옥살이까지 한 한 노동자 부인의 고통스런 삶을 기록한 기사를 읽으며, 비바람 속에 피어나는 야생화의 생명력에 이끌리기보다는 사진으로 나타날 꽃의 아름다움만 좇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내 삶이 터무니없이 사치스런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봄꽃 소식을 전하는 내 기사에 유일하게 단 그의 댓글 "예쁜 꽃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라는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봄을 온통 나 혼자 다 차지하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른 잎 사이로 쑥쑥 올라온 비비추가 참 이쁘네요. 생강나무꽃을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데 향기도 맡고 싶고…. 노랑이, 분홍이, 초록이의 고운 꽃 색깔처럼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예쁜 꽃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항상 방글이가 되겠지요?^^

이 분에게, 아니 아직도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민들레처럼>이란 노래를 들려드리며 위로하고 싶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온몸 부딪치며 해방의 봄을 마침내 맞이하길 빌면서….

1. 민들레꽃처럼 살아야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대도
민들레처럼.

2.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치며 살아야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 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글/박노해, 가락/조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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