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광이 아름다운 거문도는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딘들 역사가 없겠느냐마는 이곳은 특히 한국 근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찾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고도에서 서도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자 마자 산으로 이어지는 아늑한 풀밭이 나타나고, 한겨울이건만 아직도 가을이라는 듯 길가 풀섶에는 보랏빛 쑥부쟁이 꽃이 해맑은 모습으로 피었다.
● 임병찬 의사 순지비
삼호교를 건너면 유림해수욕장
유림해수욕장을 곁에 두고 바닷가 길로 300여 m쯤 가면 오른쪽 가파른 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돈헌(遯軒) 임병찬 의사 순지비(殉趾碑)가 나타난다.
어떤 모습을 하신 분일까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다행스럽게도 초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개결(介潔)한 성품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 돈헌 임병찬(1851-1916)
1851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호는 돈헌(遯軒)이다. 세살때 천자문을 욀 정도로 총명했으며 5살 때부터 학문의 길로 접어 들어 신동이라 하였으며 향시 백일장에 나가 수석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5세가 되던 해에 전주부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가세가 빈궁해 생계를 위하여 사역(使役)에 종사하였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백성을 구하였다.
1889년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가난한 사람 구제를 잘하여 7월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되었고,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막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0년 그 동안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회문산 북쪽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향민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소식을 듣자 동생과 함께 원수를 갚을 계획을 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노복을 해방하였다.
1904년 창의하기 위해 각부 각군에 통문을 발하였는데 정부 대신 이하가 모두 시기가 빠르다고 하여 중지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뜻 맞는 동지가 없음을 한탄하며 거사를 계획하였다. 1906년 정월 영호남의 사람들과 창의를 도모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던 경기도 포천의 면암 최익현과 연결이 되어 최익현과 임병찬은 사제의 의를 맺었으며 최익현은 임병찬에게 병권을 위임하였다. 이리하여 6월 4일 80여 명의 의사가 모여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났다.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태인, 정읍, 순창, 곡성을 점령하니 의병진 앞에 왜군은 도망하고 군수와 그 관속은 엎드려 사죄하였으며 민중의 호응도 컸다. 6월 12일 순창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 임병찬 등 13명은 일본군사령부로 잡혀가 7월 9일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그 후 면암이 옥중 단식으로 순국하자 눈물로 작별하고 그는 1907년에 귀국하였다.
1912년 임병찬은 무력항쟁과 더불어 열강들에 대하여 독립 만회의 원조를 구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던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된다. 그는 일찍부터 향약의 중요성에 착목하여, 5가 작통과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의병운동을 전개하려고 한 바 있었다. 그는 독립의군부조직에도 이 구상을 적용하여 이듬해 음력 2월 전라남북도의 조직을 완료하였다. 1914년 음 2월에는 이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여 대한독립의군부 제를 구성하였다. 독립의군부의 활동 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치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1914년 5월 일정한 날을 정하여 중앙지도부가 각국 공사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한국민이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는 투서를 하고, 이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연명 날인하여 총독부와 각 부, 경무부 및 군.병참에 일제히 투서하며, 투서 2일전 새벽이나 밤을 이용하여 각 지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거사일이 지나면 곧바로 향약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5월 23일 동지 김창식이 일경에게 붙잡힘으로써 독립의군부에 대한 일제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에 임병찬은 총독 테라우찌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총독 ;및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그 해 6월 1일 다시 사내 총독과 일본 총리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이에 일경은 동월 3일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켰다. 선생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1년 감금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유배된 후 단식으로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 영국군 묘지
고도의 남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거문항에서 약 600m 거리.
오르는 길 옆에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일부러 가꾼 것 같지는 않은데 옥살리스 연분홍 꽃도 추위에 꽃잎을 다문 채 피어있다.
1885년, 영국함대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구실로 일방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한다. 그로부터 22개월 동안 영국군이 불법으로 거문도에 주둔하는데 이를 ‘거문도사건’이라고 한다.
1887년 영국군은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의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철수하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영국함대가 한반도 해역을 지날 때면 으레 거문도에 들르곤 했다고 한다.
거문도 점령 당시와 이후 이런저런 사고로 죽은 영국군들이 묻힌 묘지인데, 당초에는 고도의 하늘땀(여객선 터미널 동북쪽 100미터 지점)에 있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인에 의해 거문리가 면소재지로 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2차대전 당시 미·영 타도의 구호가 높아지자 일본인 무뢰한에 의해 지금 남아 있는 묘비보다 더 큰 서구식 묘비는 박살이 나고 현재 남아있는 서구식 비도 두 동강이 되어 굴러 다녔는데, 해방 이듬해 섬 유지들이 보수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
-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메레이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 (비석)>
-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 (나무 십자가)
※ 거문도 사건
당시 세계적인 규모로 러시아의 남하세력에 대항해온 영국은 극동에서도 러시아의 남진책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일찍이 1860년 동해에 임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점하였는데, 이 항구는 겨울에 얼어 해만(海灣)으로서 활용가치가 적었으므로 부동항을 물색하였다. 그 대상지는 영흥만·제주도·쓰시마섬 등이었고, 이 중에서도 함남 영흥만이 가장 유력한 점령 대상지였다고 한다.
한편 영국은 1882년 한영수호의 교섭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이미 거문도의 조차를 제의함으로써 거문도에 대한 관심을 표시해왔다. 또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한국의 조정이 급속히 제정러시아에 접근하여 한 ·러밀약을 체결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국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사태가 급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러시아의 선점을 예방하고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선박 1척이 러시아가 점령 대상지로 삼았다는 영흥만 일대를 탐사한 후, 4월 15일 군함 6척·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달 하순경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한국 정부는 영국 부영사와 청나라 주재 영국 대리공사에게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 미국 ·독일 ·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하는 한편,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교섭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청나라에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는데,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위기가 고비를 넘기고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은 이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함으로써 드디어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였다. <두산백과사전>
■ 거문도사건 당시의 사진 자료들
정박 중인 HMS Pegasus호.
함장은 John Mclear. 1130톤, 포 6문, 승조원 149명, 770마력, Sloop형 기범식 포함이다.
건설중인 목조 창고
영국군과 거문도 주민들
영국군 수병
대장간 풍경
절구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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