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꽃샘 추위 속 서울의 봄꽃 소식

모산재 2006. 3. 14. 22:11

누군가가 기웃기웃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다. 누굴까? 그리고 눈길이 자꾸 창문 너머로 향한다면 당신 마음에 봄이 왔다는 증거이다.

 

갑자기 영하로 뚝 떨어지고 바람까지 몹시 심하게 분다. 겨울보다도 더 매워 꽃샘추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날씨에 집에 앉아 있자니 좀이 쑤셔 봄소식을 찾으러 카메라를 들고 나선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다. 괜히 나섰나, 피었던 꽃들도 다 얼어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지난 주 토요일, 복수초다, 변산바람꽃이다,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속속 당도하건만 온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울의 꽃소식을 찾으러 대모산을 넘었다. 산속은 생명이라곤 미동도 없는, 낙엽 쌓인 겨울 풍경 그대로이다. 실망한 마음으로 대모산을 되넘어 내려오다 자연학습원을 돌아보기로 한다. 입구 풍경은 산수국 마른 이삭들만 보이는 여전한 겨울 모습인데, 산괴불주머니가 푸른 싹을 제법 키우고 있다. 꽃 필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아쉬워 불국사로 향하는데, 아니, 이럴 수가! 

비탈길 양 옆에 노란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생강나무꽃이 벌써 피었나, 아니, 산수유가 피었구나! 하고 다가가보니, 생강나무도 산수유도 아니고 풍년화가 피었다. 탐스러운 꽃이 풍년을 연상하게 해서 붙여진 그 이름 풍년화! 봄기운이 더욱 완연해진 따스한 날씨에 풍년화엔 무수한 벌들조차 잉잉대고 있다.

 

 

 

 

올해 봄 가장 먼저 풍년처럼 풍성한 꽃소식을 접한 기쁨에, 또 다른 꽃 소식을  맞으러 일주일이 지난 오늘 다시 대모산을 넘는다. 여전히 등산로 주변은 겨울 풍경 그대로다. 양지바른 쟁골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뒤 밭 언덕에 꽃다지들이 희미한 노란 꽃을 내밀고 있다. 

 

 

한 송이 꽃으로는 너무 작지만, 꽃대가 길게 자라 여럿이 어울리면 제법 작은 유채꽃밭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꽃이다. 민중가요의 서정성을 넓힌 김호철의 '꽃다지'라는 노래가 절로 떠오르며 지난날에 대한 감상에 잠시 젖어본다.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나 오늘도 캄캄한 창살 안에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없어도

   퀭한 눈 올려다본 흐린 천정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마을 뒷산 양지바른 언덕엔 무덤이 있다. 지난 가을 조개나물 어린 싹이 많이 자라고 있었건만, 비교적 이른 봄에 핀다는 조개나물은 생명의 흔적조차 없다. 다만 양지꽃만이 곧 꽃을 피우려는지 꽃망울이 부풀고 있다.

 

 

쟁골에서 길 없는 산허리를 가로질러 교수마을로 들어선다. 교수마을 동쪽 무덤이 많은 언덕받이 양지쪽에 양지꽃 한 포기가 홀로 촛불인듯 샛노란 꽃을 피우고 영하의 찬 바람에 오돌오돌 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진달래도 꽃봉오리가 벌어지려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다만 몇몇 꽃봉오리들이 아래의 사진처럼 붉은 꽃잎을 살짝 내밀고 있을  뿐...

 

 

 

마을 가까운 양지바른 텃밭에는 돈나물이 풍성히도 자랐다. 이처럼 싱그러운 봄빛이 또 있을까 싶게...

 

 

 

마을 밭과 길가 언덕받이엔 어느 새 별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꽃, 봄을 가장 먼저 알려 주고서는 소문없이 씨앗을 맺고는 조용히 사라지는 꽃이다.

 

 

 

못골까지 이르는 길가 언덕엔 냉이꽃도 군데군데 활짝 피었다. 이 녀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실하게 자랐다. 잎사귀도 너풀너풀 풍성하게 자랐고 꽃도 크고 시원스럽게 피었다. 

 

 

지난 주에 피기 시작했던 개불알풀 꽃들은 소문없이 지고 있다.

 

 

못골의 마을 앞 개울가에는 산수유나무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샛노란 꽃이 생강나무 꽃과 사뭇 닮았다. 꽃잎이 5장인 생강나무와는 달리 산수유나무의 꽃잎은 4장인데, 맨눈으로 확인하는 게 쉽지 않다.

 

김종길 시인은 '성탄제'라는 시에서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라고 했지만  이 나무는 산 속에서 자라는 야생이 별로 없다. 생강나무가 대개 산에서 절로 자라는 데 비해, 산수유는 민가 주변이나 밭 주변에 약용이나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대모산 너머 쟁골과 교수마을, 그리고 못골의 들판을 돌아본 후 다시 다시 겨울 풍경인 대모산을 되넘는다. 개포동으로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갑자기 숲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 거기에 그토록 기다렸던 생강나무 노란 꽃이 점점이 불을 밝히고 있다.

 

'점순이'가 '나'를 떠밀어 '알싸한 향기'에 아찔하게 만들던 김유정의 그 '동백꽃'이 바로 이 생강나무 꽃이다. 사진에 담기 전, 본능적으로 코를 꽃술에 대본다. '알싸한 향기'에 멀어져 가는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등산로 곁에 만든 화단에선 비비추 새잎들이 힘찬 생명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올 봄에 만난 가장 싱그럽고  풍성한 푸른 잎. 양지에서도 겨우 땅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있었는데, 바람이 없는 곳이어선지 응달인데도 잘도 자랐다.

 

 

 

대모산을 내려와 양재천으로 향해 걷는데, 어디선가 와 닿는 듯한 눈길을 느껴 두리번거리는데, 얼어붙은 가지에 송이송이 핀 해맑은 매실 꽃이 눈에 들어온다. 개원중학교 담장 밖에는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데, 어쩌자고 이 나무만 꽃을 피우고 있다.

 

"매화의 한 살이는 추울지언정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 같은 혹한에 맞서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안스러우면서도 오연한 기품이 대견스럽다.

 

 

 

양재천 풍경도 멀리 봐서는 아직 있겨울 풍경 그대로 퇴색한 갈색으로 덮여있다. 그러나 개울가에는 제법 싱그러운 풀잎들이 한뼘씩 자라 녹색 지대를 넓히고 있다. 이렇게 강 언덕에 짙어가는 풀을 바라보면 정지상의 '송인'이라는 시가 절로 떠오른다.

 

   비 갠 강 언덕엔 풀잎이 파릇파릇

   임 보내는 남포 나루엔 슬픈 노래 사무치네.

   대동강 푸른 물은 그 언제 다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산책로 주변 언덕에도 마른 풀 속에 숨어 애기똥풀들이 제법 파랗게 자랐고, 배암차즈기, 지칭개, 달맞이꽃 들도 잎들이 너풀너풀해졌다.

 

 

 

양재천의 북쪽 뚝방에 올라서자 개나리꽃이 노란 꽃들을 터뜨리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미동도 없던 개나리가 아파트를 배경으로 따스한 볕바라기를 맘껏 해서인지 군데군데 환하게 피었다. 다 피지 않은 것도 곧 터질듯 꽃봉오리들이 부풀었다.

 

 

 

산책로 주변에는 큰개불알풀 꽃들이 지고 있다. 볕이 따스햇던 탓인지, 땅에 붙어 자라는 이 녀석만 꽃을 일찍 피우고 꽃들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다. 개불알풀이라는 이름을 민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을 불러주기도 한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 잘도 붙인 이름이다.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꽃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담고 있지 않는가.

 

 

 

언덕받이엔 쇠뜨기 생식경도 쏘옥 쏙 솟아 올랐다. 쇠뜨기라는 이름은 소가 뜯어 먹기 좋아해서 붙여진 것이다. 봄 언덕이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의 하나가 파랗게 자란 쇠뜨기 밭에 애기똥풀이 노란 꽃을 피운 모습일 것이다.

 

 

 

개울가에는 버들개지도 탐스런 꽃을 피우고 있다. 남쪽에서야 2월에도 한창 꽃을 피우는데, 양재천의 버들개지는 지금이 한창인 듯 보인다. 갯버들이라고도 불리는 이 버들개지야말로 가장 먼저 봄 소식을 전해 주는 꽃이다.

 

 

풍년화만 만발했을 뿐, 대부분의 꽃들은 이제 피기 시작했을 뿐이지만 서울의 하늘 아래에도 봄은 성큼 들어서고 있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생명은 쉼없이 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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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사는이야기/0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