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3)

모산재 2007. 4. 3. 09:57
[스크랩] 제주4.3의 슬픈 증언(3)
 


※ 아래 글은 굴렁쇠 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81940에서 퍼온 것입니다. 4.3의 아픈 진실이 보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 팽나무 / 강요배 그림

 

 

 

'도피자 가족에 대한 대량학살의 기억

 

지나간 역사의 진실을 캐는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 기억이다. 기억은 한 사회의 다양한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닌 '그 때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에 시선이 고정된다.

 

이 '기억'은 한 개인의 고유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인적 기억'도 사회적 현상이 된다. 기억의 사회성을 처음 지적한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한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할 만한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기억되는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이 일련의 '제주 4.3의 증언'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많은 기억 가운데 대량학살로부터 생존한 사람들의 기억을 꺼내놓는 과정이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생존'했다는 경험 자체가 남다른 증언자들의 기억이 억압과 공포 속에서 조각나고, 생각과 느낌이 분열되며, 생존자 자아마저 극심한 분열을 겪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주 4.3의 진실을 캐는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추적이다. 대량학살의 기억 가운데 이번에 다루는 증언은 '도피자 가족에 대한 학살'이다. 제주 4.3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피해사례다.

 

당시 진압군은 소개령(疎開令)에 따라 중산간마을에서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청년이 한 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산사람(무장대)과 내통했다거나 무장대원이 된 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도피자 가족의 희생에는 본래 해변마을 주민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호적과 대조하며 도피자 가족을 찾아냈다. 이 때 청년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나이 든 부모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이 등 주로 노약자들이 희생됐다. 주민들은 이를 대살(代殺)이라고 불렀다. '가족 대신 죽는다'는 뜻이다.

 

총살은 진압군 주둔지인 해변마을에서 벌어졌다. 도피자 가족에 대한 총살이 내내 그치지 않자 소개민들이 다시 산으로 도피함으로써 4.3은 더욱 장기화되었다.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10월 15일 공식문서로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당시 기억들이 생생히 들어 있다.

 

 

 

끔찍했던 애월 하귀마을의 참극

 


▲ 토벌대의 포로 / 강요배 그림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작전이 막 시작될 무렵인 1948년 11월 중순경, 애월면 하귀리에서는 청년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1948년 5월 경찰에 의한 총살이 잇따라 벌어지자 청년들은 저마다 은신처를 만들어 꼭꼭 숨어 있었다.


1948년 12월 5일경, 외도지서에서 하귀리 주민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월동용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며 톱과 도끼 등을 갖고 지서 앞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외도지서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간 숨어 지낸 청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선뜻 나서지도 못할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고민 끝에 주로 노인과 부녀자들이 연장을 들고 나왔고, 스스로 경찰에게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자신한 일부 청년들도 함께 지서로 갔다.

그러나 '월동 장작 마련'이라는 것은 함정이었다. 외도지서에서는 나무 베러 갈 생각은 않고, 다짜고짜 '너 도로차단했지', '전봇대 끊었지'라고 추궁하며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청년들을 골라내 차에 태웠다. 이때 많은 청년들이 차에 태워졌고 이들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형무소 수감자가 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밀리던 국군에 의해 집단 총살됐던 것.

유족들은 언제 희생됐는지도 몰라 주로 생일에 맞춰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때 이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준 것은 끌려간 지 1년 가량 지난 후 대구형무소에서 보내 온 엽서였다. 희생자 중 강창하의 노모는 1960년 4.19혁명 직후 국회 양민학살조사단에게 이렇게 신고했다.

 

 

외도지서에서 화목(火木)하여 오라 하여 출두한 바 그대로 수감하여 대구형무소에 보내여 버려서 대구형무소에서 편지까지 왔으나 행방불명. 어머니 신정모(77), 딸 강구자(19)   -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해변마을에 내려진 '노력동원령'과 '자수공작'은 비단 하귀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강경작전 초기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제주도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노력동원령'으로 일부 청년들을 잡아들인 외도지서에서는 뒤이어 '자수공작'을 펼쳤다. 첫 자수공작은 개수동(蓋水洞, 후에 '학원동'으로 개명)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일주도로(12번 국도)에서 500m 가량 산 쪽으로 올라간 곳에 위치한 개수동은 작은 마을이지만 뛰어난 인물들이 많아 하귀리의 다른 자연마을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외도지서에서는 일단 개수동 청년들에게 자수하라는 통보를 보냈다. 개수동에도 무장대로 입산해 활동하던 청년들이 일부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무슨 근거인지 마을 인근에 숨어 있는 청년 10명의 이름을 지목했다. 이들이 나타나 자수하면 모두가 무사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크게 당할 것이라는 통보였다.

이에 마을에서는 이들 청년과 유지들이 모여 긴급대책회의가 열렸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목 받은 청년들이 출두하긴 해야겠는데, 엊그제 외도지서의 동원령에 나갔던 청년들이 돌아오지 못한 채 제주읍내로 끌려갔기 때문에 경찰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설왕설래하다가 지목된 10명 중 한 명인 김호중이 앞으로 나섰다. 김호중은 "일단 내가 먼저 출두하겠다. 내가 무사하면 경찰의 약속이 증명되는 것이니 그 때에 뒤이어 자수하라"며 홀로 외도지서로 갔다. 그러나 경찰은 김호중을 12월 7일 총살해 버렸다.

곧이어 12월 10일 이른 아침, 외도지서 주임 김영철을 비롯한 경찰과 대동청년단원들이 개수동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주민들은 이미 경찰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약자들이 숨을 곳은 없었다. 사태를 직감한 어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채 경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호중씨가 총살되자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지목된 나머지 9명 등 청년들은 산으로 도망쳐 버렸어요. 그러자 어른들은 '야, 이거 진짜 큰일났다'며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마을에 오기 전날 밤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모두 피신하라'는 정보가 외도리 쪽에서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요. 사태가 심각함을 느낀 어른들은 집집마다 가족들을 모아 놓고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 고창선(高昌善, 66세, 애월읍 하귀2리), 2001. 8. 23  채록 증언

 

개수동에 들이닥친 경찰은 집집마다 수색하며 주민들을 속칭 '비해기(飛鶴)동산'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피신한 청년들의 부모와 자식 등 이른바 '도피자가족'을 골라내 집단총살했다. 이때 김낙준(여, 69) 고희전(65) 김재봉(65) 고영삼(62) 고두주(60대) 백용흥(여, 60대) 현귀덕(여, 60대) 강화순(여, 61) 강승학(50대) 김지수(50대) 강기유(49) 고정규의 아내(30) 김계생(여, 29) 강두중(16) 등이 희생됐다. 도피자가족 외에도 장전리와 광령리에서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 내려온 사람 등 모두 36명이 함께 총살 당했다.

 

아, 아비규환의 '비학동산'이여

이 '비학동산 총살사건'은 임산부를 발가벗겨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과 철창으로 찔러 살해하는 잔혹함을 드러내 두고 두고 입에 오르내리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임산부는 고정규의 아내였다. 고정규가 도피했다는 이유로 대신 그의 아버지(고희전)와 아내를 죽인 것이다.

 

이 총살극 과정에서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자식을 감싸안은 덕분에 아이 혼자 살아남았다는 증언이 많았다. 총살 대상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그 소년은 당시 13살이던 안인행(安仁行)이었다. 당시 애월면 장전리가 고향인 안인행의 가족들은 소개령에 따라 개수동으로 내려와 살던 중이었다. 안인행의 부친 안태룡(安太龍, 33)은 이미 5일 전에 벌어진 '외도지서 장작사건'의 희생자였다. 닷새 간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안인행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 부모들 /강요배 그림

경찰은 주민들을 비학동산에 모이게 한 후 가택수색을 벌여 집에 남아 있던 두 사람을 끌고 왔습니다. 광령리에서 소개해 온 부자(父子)인데 부친은 70대 노인이었고 아들은 35세 정도 됐습니다. 경찰은 먼저 아들을 패기 시작했습니다. 보다못한 부친은 "우린 소개민이다. 아들은 4대 독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친을 구타했고 그 노인은 매를 견디지 못해 금방 죽었습니다. 부친이 죽자 아들이 도망을 쳤지만 약 150m 정도 도망치다 총에 맞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공포에 떨고 있는데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이어 경찰은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폭도가족'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외도지서 장작사건' 때 잡혀갔다는 이유로 끌려나오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소개민이라서 당초 외도지서의 동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개 온 우리에게 집과 밭을 빌려준 주인집 노인이 톱과 도끼를 들고 외도지서로 가려 하자 그 분에게 고마움을 표하려고 대신 갔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우린 4형제였는데 13살이던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10살, 7살, 4살 난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姜仁八, 34)는 죽음을 직감하고 어린 동생들을 억지로 떼어 냈습니다. 그러나 나와 10살 난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묶였지요.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로 10살 난 동생은 풀려났지만 내게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2명이 함께 묶여 30m 가량 떨어진 밭으로 끌려가게 됐지요. 경찰들은 "칼로 찔러 죽이자", "시간 없으니 총으로 쏘자"며 자기들끼리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내 머리 속에는 "칼에 찔리면 고통이 오랠 것이니 총에 맞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경찰들이 "총에 덜 맞은 놈이 있을 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그때도 난 어머니 밑에 깔려 무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4형제는 졸지에 고아가 됐는데 7살 난 동생은 홍역으로, 젖먹이 막내는 젖을 못 먹어 곧 죽어버렸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nbsp;- 안인행(安仁行, 67세, 애월읍 장전리), 2001. 8. 21 채록 증언

 

개수동 주민에 대한 경찰의 총살은 계속 이어졌다. 경찰들은 수시로 마을에 와서 '도피자가족'을 찾아내 총살했다. 그 중 1949년 1월 24일은 희생이 컸다.

이날 저녁 무렵 고대규(高大奎)의 아내인 김산춘(28)은 외도지서의 출두명령을 받았다. 김산춘은 앞서 비학동산 총살사건 때 팽나무에 매달린 채 살해당한 여인과 동서 사이이다. 그때는 경찰이 김산춘의 가족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지서에서 뒤늦게 남편 고대규의 도피 사실을 파악한 것이었다.

세 살 난 아기를 업고 나간 김산춘은 외도리 입구에서 아기와 함께 총살됐다. 그날 외도리에서는 이들 모자 외에도 강선(여, 60대) 강계효(50대) 신이신(여, 50대) 김정복(여, 37) 강재생(여, 30대) 김정(여, 30대) 강선행(여) 강경수(20대) 등이 남편이나 자식이 피신했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희생됐다.

여기 저기 숨어 있던 청년들도 결국엔 모두 잡혀 총살됐다. 개수동의 희생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호적과 족보를 일일이 대조했다는 고창선씨는 "당시 43가호 56세대가 살던 마을에서 63명이 희생됐다"고 증언했다.

 

 

꽃이 지다, '여성'이라는 죄...

 

경찰들의 만행은 사태가 누그러진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특히 한 처녀의 희생은 주민들의 가슴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하귀1리가 친정인 김계순(金癸順)은 18살 때 겪었던 참으로 힘든 증언을 했다.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한 그 일로 한동안 몹시 앓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 김계순(金癸順, 70세, 애월읍 용흥리), 2001. 8. 22 채록 증언

 

희생자의 이름은 강조순(姜朝順)으로, 동네에 예쁘다고 소문났던 당시 18살의 꽃다운 처녀였다. 그러나 강조순이 희생당한 구실이 됐던 그녀의 오빠 강조행(姜朝行)은 이미 4.3 발발 초기에 금덕리와 고성리 주민 50여 명과 함께 신엄지서 습격자로 몰려 제주경찰서로 끌려가 있었다. 1948년 4월에 유치장에 들어가 6개월 갖은 고초를 겪다가 광주형무소로 이송돼 거기서 약 3개월 후 재판을 받았는데 검사 기각으로 1948년 12월 31일에 무죄석방됐다. 제주도가 시끄러우니까 금방 오지 못하고 8개월 가량 지내다 1949년 가을철에 제주도로 돌아왔을 때는 남동생 강조정(20)과 누이동생 강조순(18)이 참혹하게 죽은 뒤였다.

 

외도지서의 주임을 비롯한 경찰 대부분은 서북청년회 출신이었다. 이들의 행태는 너무도 잔인해서 4.19 후 국회 차원에서 벌인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때 제주도의 '고발 제1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희생자 신고를 접수한 <제주신보>는 "아무리 계엄령이라 할지라도 일가 10명, 그것도 67세의 노인을 위로 생후 단 10일의 영아까지를 한 곳에서 총탄으로도 아닌 죽창과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법이 어디 있으며 또 명분이 설 수 없을 뿐더러 그런 벌이 어느 곳에서 통용될 것인가"라며 고발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 군과 경찰에 끌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전 제주서 외도지서 주임 김병채(金炳採) 경위 및 전 동 지서 이윤도(李允道) 순경이 피고발인으로 되어 있는 동 고발장에서 본 '고발의 사실'은,

전기 피고발인 등은 '제주경찰서 외도지서에 경찰관으로 근무 당시 제주시 외도리 252번지 거주 이양호(李亮晧) 외 9명의 일가족을 법적 수속도 없이 1949년 2월 17일 하오 3시경 제주시 외도1동 속칭 절뒤(寺後)에서 죽창으로써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실이 있는데… (중략) 신고서에 보면 아들 한 사람이 집에 안 보인다는 유일한 명목. 그러나 장남 이완영(李完榮)은 폭도에게 납치되어 간 것이었다.

그것이 외도동 252번지에 사는 그의 부모인 이양호(당시 67세)씨, 고정숙(63세)씨를 비롯한 그의 아내 고의순(41세)씨, 동생 기영(18세)군, 아들 부부 영희(19세)씨, 고춘자(19세)씨, 그밖의 자식 봉희(18세), 옥자(7세), 옥희(3세) 그리고 장남 태생의 손자인 생후 10일의 영아까지의 4대에 긍(亘)해 목숨을 바쳐야 할 죄목이 된 것이었고, 특히 전기 봉희군은 불구자로서 기동을 못하는 몸이었으나 모친에 업혀 출두했었던 것이라 하며, 지서주임의 명령으로 불리워진 이 일가 10명은 한 장의 청취서도 받지 않고 외도1동 속칭 절뒤에 끌려가 하오 3시경 일가족이 같은 자리에서 죽창에 의하여 학살되었던 것이라는데,

영아의 종조모의 손으로 신고된 문서에는 당시 리 민보단장이었던 외도2동 거주 이상훈(李尙勳.43)씨를 증인으로 그리고 하수인과 책임자의 이름을 당시 외도주임 김병채 경위, 그리고 동 이윤도 순경으로 뚜렷이 밝혀 있으며 진상을 규명 후 정부보상을 요망하고 있는 것이다.   - 濟州新報, 1960년 6월 24일자

 

'도피자가족'에 대한 학살은 제주 섬마을 곳곳에서 저질러졌다.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이 무장대의 근거지라는 전제 아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격을 가했다.

제주의 섬은 온통 피빛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섬사람들의 통곡을 토해내던 피울음, 국가권력의 총칼에 죽어가면서 흘렸던 붉은 피, 불타는 마을의 저 붉은 원한들...참된 해방세상, 통일세상을 꿈꾸면서 항거했던 분노의 심장을 향해 미국과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은 양민학살극에 춤을 췄다. 제주민중을 학살하는 광란의 춤을... 
/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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