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2)

모산재 2007. 4. 3. 09:52

 

※ 다음 글은 굴렁쇠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81452에서 퍼온 것입니다. 4.3의 아픈 진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4.3은 항쟁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삶을 파괴한 죽음의 기록이다. 제주 섬사람들이 저항했던 분노의 함성만큼 죽음의 숫자가 역사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무덤에 있지 않고 살아있는 죽음을 본 일이 있는가. 반세기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혼백과 더불어 헤매고 있을 4.3의 실체와 진실찾기가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며칠 제주를 돌아 다니면서 제주의 풍광을 가슴에만 넣어 두었다. 사진에 기록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지 못한 이 죽음의 땅, 항쟁의 섬에서 그 무슨 4월의 아름다움이란 말인가. 4.3영령들에 대한 작디작은 예의만이라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이 놀라운 담론이 또 글쓰기를 저지했다. 며칠 나는 부끄러웠다. 책상 앞에 꺼내 놓은 4.3 기록물들이 참으로 무겁게 심신을 괴롭혔다.

 

 

"제주 4.3사건의 대표적 양민학살 사례

나의 마음은 북촌리에서 멈췄다. 제주 4.3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북촌리 사건을 피해 가지 못한다. 4.3에 심장을 갖다 댄 사람들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을이 제주 북촌마을이다. 한없이 펼쳐진 바다와 바다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헤집고 보면 그 속에 숨겨진 피빛 사연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 부모들 / 강요배 그림

 

이 마을의 비극은 2003년 12월 정부 공식문건으로 발간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1949년 1월17일 일어난 '북촌리 사건'은 군인들에 의해 300여명의 무고한 주민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제주 4.3건의 대표적 양민학살 사례다.

1월 17일(음력 12월 19일) 아침 세화리 주둔 제2연대 3대대 11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유격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황한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의 시신을 들것에 담아 함덕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흥분한 군인들은 본부에 찾아간 10명의 노인 가운데 경찰가족 한 명을 제외하고 함덕리 해변 서우봉 기슭에서 모두 사살해 버렸다. 2개 소대 가량 되는 군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친 것은 이 때였다.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 무장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남녀노소, 병약자 가릴 것 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몰아 내고는 온 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400여 채의 민가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1,000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군 지휘관이 민보단장을 불렀으나 타 지역에 출타 중이었다. 이에 머뭇거리던 청년단장 장운관(39)이 나오자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해서 폭도를 양산시켰다"며 총대로 사정없이 때린 뒤 웃옷을 벗겨 운동장을 돌리다가 사살해 버렸다. 마을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다.

 


▲ 집결지로 사용됐던 비극의 장소 북촌초등학교와 현재까지
시신들이 매장돼 있는 옴팡밭

군인들은 다시 군경 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켰다. 어린 학생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군경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을 20여명 단위로 묶어 '너븐숭이'라 부르는 옴팡밭(움푹 패인 밭)으로 끌고가 차례로 죽이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만 죽은 게 아니었다. 어린이나 노인, 여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았다. 이 주민학살극은 오후 5시께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다. 이 날 희생된 주민들만 300명이 넘었다.

떼죽음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살중지를 명령한 대대장은 주민들에게 다음 날 이웃마을인 함덕으로 오도록 전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살아남은 주민들 가운데는 다음 날 산으로 피신한 사람, 함덕으로 간 사람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대대장의 말대로 함덕으로 갔던 주민들 가운데 100명 가까이가 '빨갱이 가족 색출작전'에 휘말려 다시 희생됐다.

이 사건으로 북촌마을에는 대가 끊어진 집안이 적지 않다. 제주도의회에서 발간한 4.3피해조사보고서는 이 마을의 희생자를 총 47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군의 살상훈련을 위한 학살명령이라니...



대대장 차량 운전수로 차출됐던 김병석씨(당시 19세·함덕 출신·경찰국 차량대 근무)는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참극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난 운전면허증이 있는 덕에 경찰에 들어간 후 차량계에 배속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2연대 3대대 선임하사가 와서 "대대장 차가 고장났으니 자동차 하나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이에 차량계장은 "3대대 주둔지가 함덕인데 네 고향이 함덕이니 오랜만에 고향에도 갈 겸 며칠간 다녀오라"며 저를 보냈습니다.

본래 GMC를 몰았는데 그 땐 앰블런스 형식으로 된 차로 함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대장을 모시고 월정리에 있는 11중대를 둘러본 후 대대본부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보다 앞서가던 군 차량이 북촌국민학교 앞에서 기습을 당했어요. 그래서 대대 출동명령이 내려졌고 나는 대대장을 태운 채 북촌국민학교로 갔습니다.

그 때 군인들은 북촌리를 다 불태우면서 주민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습니다. 한 줄에 80∼100명씩 여덟 줄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대장은 우선 "군인·경찰관 가족을 뽑아내라"고 한 후 차안에서 참모회의를 열었어요. 앰블런스 형식의 차니까 중앙은 비고 양쪽으로 긴 의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약 7~8명의 장교가 모였습니다. 그 때 "돌담 위에서 박격포를 쏘아 몰살시켜 버리자"는 등 여러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한 장교가 "군에 들어온 후에도 적을 살상해 보지 못한 군인들이 있으니까 1개 부대에서 몇 명씩 끌고나가 총살을 해서 처리하는게 낫지 않느냐"고 하자 결국 그 방식으로 결정났습니다.

그러자 나는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북촌리는 고향 함덕리와 가까워 우리 일가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는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대대장에게 급히 사정했더니 그들을 빼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혼이 나갔는지 아무리 부르려 해도 친척과 동창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나와 같이 운전수였던 장윤석이란 사람만 생각나 그와 그의 가족 7~8명을 우선 빼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대장에게 "우리 집안은 무장대에게 어머니를 잃었고 9남매 중 4형제가 경찰로 있는 반공가족입니다. 그런데 저기 끌려나가는 노인.부녀자.어린아이들이 무슨 사상이 있습니까? 저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은 "나도 살려주고 싶지만 그러면 어떻게 저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대대장도 본래는 주민들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나는 "걱정 마십시오. 함덕리에만 가면 다 저들의 친척이 있는데 함덕리는 큰 마을이니까 다 해결이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속 사정하니까 대대장은 "그러면 네가 책임져라"면서 사격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백명이 끌려나가 총살된 상태였습니다.
(증언자 : 김병석씨, 북제주군 함덕리 출신,  2002년 5월 31일, 증언 당시 73세)

 


▲ 천명 / 강요배 그림

아, 이게 무슨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미쳐버리지 않고서야 인간의 생명을 400여명이나 끔찍하게 살해할 수 있는가. 그것도 군인들에게 '적' 사살 경험을 주기 위해 학살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사람 죽이는 연습이라니...
'킬링필드' 학살의 땅 북촌마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해는 지고 살을 도려내는 동지섣달 추위 속에 가족들을 찾는 울부짖음과 집에 매어둔 가축들이 불에 타면서 지르는 비명소리, 짖어대는 제주 칼바람 소리가 이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타다 남은 집구석에서 밤을 새웠고, 다음 날엔 겨우 정신을 차려 죽은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나섰다.

워낙 많은 죽음에다 시신 수습의 자유마저 보장되지 않았고, 또 마을에 남은 건 대부분 아녀자들이었기 때문에 임시로 시신을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진정된 후 그래도 연고가 남은 사람들의 시신은 그나마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나 무연고자 시신은 그 후로 오랫동안 방치됐다.

학교 동쪽 언덕 작은 공원인 탯질밭에는 지금도 어린애기 무덤이 남아있다. 아이들 영혼은 저승에 가지 않고 까마귀가 갖고 간다 하여 정식 무덤을 쓰지 않는 제주도의 풍습에 따라 그 때 죽은 애기들이 그냥 그 자리에 묻힌 것이다. >

 

끔찍한 악몽, 과부의 마을…온 동네가 같은 날 제사

 
끔찍하고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당했음에도 북촌리 주민들은 이후 이 사건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희생자들을 위령하며 통곡했다는 이유만으로 줄줄이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렀던 일이 있었기에 주민들을 더욱 움츠려들게 했다.

끔찍한 악몽, 과부의 마을…지금도 북촌은 해마다 음력 12월 18일이 되면 온 동네가 제사를 지낸다. 미증유의 집단학살로 북촌리는 한때 마을이 텅 비고 한 세대의 남자가 거의 사라져 버린 대참극이었다.

 


북촌마을의 이 팽나무는 알고 있을까

15년전 내가 북촌리 아주머니, 할머니들을 만난 날도 그들은 울고 있었다. 이게 사람사는 세상이냐고,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이렇게 몰살시켜도 되냐고...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의 무대가 되면서 비로소 그 역사적 비극을 세상에 알린 북촌마을. 이날의 학살로 북촌마을은 남자가 없는 마을,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렸다. 자신이 왜 죽임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 그 피맺힌 원한은 지금도 북촌리 마을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제주 출신 김광렬 시인의 글을 읽으며, 이 살 떨리는 마음을 추스린다.  / 굴렁쇠

그대 눈은 살아 있다
그대 집 안방에 툇마루에
마당 한쪽에 소담스레 자라나는
봉숭아 채송화 수국 그런 꽃들 속에
막 비상하는 새들의 날개짓 속에
풀잎 속에 돌멩이 속에
잘 여문 보리 이삭 속에
그대 눈은 살아 번뜩이고 있다
 
그대 귀는 살아 있다
바람이 흔들어 놓고 가는 억새풀 속에
뒤뜰 대나무 푸른 잎사귀들 속에
파도 속에 한숨 속에
여물을 입 안에 궁굴리다
게으른 하품하는 소 울음 소리 속에
석양녘 개짖는 소리 속에

그대는 살아 있다
화해와 용서와 평화와
공존의 눈짓으로 몸짓으로
4월이면 그대는 살아
우리 곁으로 온다
더 이상의 싸움은 부질없는 것임을
깨우치려는 듯 안타깝게 그것을 말하려는 듯
입 벙긋거리며 화평한 얼굴 속
검정 고무신 끌며

  - 김광렬님의 '그대는 살아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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