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1)

모산재 2007. 4. 3. 08:23

 

오늘은 잠들지 않은 남도 제주도에서 4.3항쟁의 비극이 일어난 지 59돌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을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하여 스크랩한 자료를 게시합니다. 1~8회에 걸쳐 연속해서 싣는 이 글은 다음에서 퍼 온 글임을 밝힙니다. =>  http://blog.ohmynews.com/rufdml/130384(내 마음속의 굴렁쇠)

 

▲ 녹두 / 강요배 그림

 



4월, 그 슬픈 아우성


해마다 4월이 오면 제주는 눈물의 섬이 된다. 4월에 꽃망울을 터트린 노오란 유채꽃에도 그날의 슬픈 영혼이 되살아 난다. 지천을 떠돌고 있는 섬사람들의 피울음이 산천을 떠돌면서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통곡한다. 애달픈 우리들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해 달라고, 왜 우리가 죽어갔는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밝혀 달라고 슬픈 아우성이다.

7년여에 걸친 대학살은 반세기가 넘도록 제주를 '변방에 우짖는 섬'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상 유래없는 이승만 정권의 집단광기는 1948년 12월에서 1949년 2월 사이에 극에 달했다. 이 기간 군경 토벌대가 중산간 마을을 불에 태워버리자 많은 양민들은 산으로 피신했다. 소개령(疎開令. 토벌대는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방침 아래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이주토록 했고, 중산간 마을의 모든 집들을 불태웠다)이 채 마을에 떨어지기도 전에 진압군이 먼저 들이 닥쳐 불바다를 만들었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점점 조여 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사를 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어머니, 할머니들도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살을 에는 겨울 한라산으로 올랐다. 숨어있던 굴이 토벌대에게 발각돼 온 가족이 몰살되기도 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가족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피울음을 뱉었다.

 

 

▲ 장두 / 강요배 그림

 

초강경 진압 때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살이 떨렸다. 한겨울이 되면서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에 몸부림치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두려움과 배고픔에 울던 아이들도 눈물이 말라 버렸다. 숨어 지내던 사람들은 군경의 합동수색에 발각돼 대부분 죽음의 구덩이로 내던져졌다. 입산자의 성별과 나이만으로도 이들이 산에서 근거지를 마련해 이승만 정권과 싸우는 무장대원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진압군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총살했다. 소명기회도 없었다. 이들의 희생은 그들에게 '화려한 전과(戰果)'로 기록되고 승리의 월계관이 됐다. 중산간 마을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희생도 컸다. 토벌대는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수시로 학살했다. 또다시 피난길에 올라 '입산'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삶의 희망이 무너져갔다.그렇게 제주민중들은 죽어갔다. 500여명의 산사람(무장대)과는 다른 3만에서 5만에 이르는 죽음의 숫자. 그 슬픈 주인공들 중에는 토벌대와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고, 토벌대를 증오하며 절망만을 씹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섬을 지키기 위해 밤이면 일어서던 제주 사람들...그들의 죽음은 밝은 대명천지에 늘 찾아왔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자국 국민에게 이토록 처참하게 총부리를 들이댄 일이 있었던가.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도 자기 국민에게 이렇게 집단광기를 부렸던가. 난징대학살도 중국정부가 저지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내 고향 어음리의 참극


내 고향은 어음리다. 제주4.3의 슬픈 증언을 먼저 소개하지 않고 이 글을 쓸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서, 제삿날 친지들로부터, 마을 삼촌들로부터 들어왔던 4.3의 이야기가 자꾸 내 가슴팍을 찢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 중산간 소개령으로 해안마을로 이주하는 주민들

따라서 이 글은 프롤로그격이 될 것이다. 4.3의 진실을 캐기 위해 죽인 자들의 만행을 더듬는 이 순간도 살 떨리는 아픔을 지울 수 없다. 이 증언은 정부 공식문건으로 발간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나의 기억과 연결되는 사례를 중심으로 재구성해 본다.

제주4.3사건 때 마을의 운명은 대개 그 마을의 위치에 따라 좌우됐다. 군경 주둔지인 해안부락  주민이라면 군.경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무장대가 장악하고 있던 중산간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월읍 중산간 지대에 자리잡은 어음리 역시 다르지 않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 '왓샤시위'를 했고 식량을 모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청년들 중에는 아예 입산해 무장대원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낮에는 진압군이 올라왔다가 청년들을 찾지 못하면 애꿎은 주민들만 구타하다 돌아갔다. 이 때야말로 낮에는 토벌대 세상, 밤에는 무장대 세상이었다.

1948년 10월경부터 어음리에 경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철도경찰 20여 명이 옛 서당 자리에 진을 치고 진압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부터 마을에서 무장대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철도경찰은 청년이 눈에 띄면 여지없이 총격을 가했다. 1948년 11월 15일경 진압군은 어음리에도 소개령이 내려졌다. 마을에 들이닥친 진압군은 주민들을 공터에 집결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져온 명단 속의 청년 10여 명을 불러내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를 하다 한림국민학교로 끌고 가 닷새 후인 11월 20일 모두 총살했다.


▲ 제주 어음리 빌레못동굴

소개작전은 11월 15일경부터 약 3일간 진행됐다. 진압군은 주민들에게 직접 자기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하면서 마을 전체를 다 태워 없앴다. 이렇듯 소개작전은 산사람(무장대)과 마을사람들의 소통을 차단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을 모조리 불바다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어음리 빌레못동굴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처참했다.(제주 4.3을 이야기 할 때 중요 사례 중의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빌레못동굴은 총 길이가 11,749m로 단일계통의 화산 용암동굴로는 세계 최장이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돼 있다. 빌레못동굴은 마을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던 목초지와 경작지 부근에 있었으나 4.3 때까지만 해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그 존재를 거의 모르고 있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만큼의 좁은 입구를 바위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굴의 온기 때문에 겨울철이면 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지만, 주민들은 인근에 산재해 있는 작은 '궤'('궤'는 제주말로서 위로 큰 바위나 절벽 따위로 가리워 지고, 땅 속으로 깊숙이 패여 들어간 굴) 정도로 알았다.


다음은 1949년 1월 16일 있었던 4.3 증언 내용이다.

(애월리 해안부락으로 갔다가 민애청 가입자로 몰려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 무렵 알게 된 빌레못동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는 납읍리 주민 28명이 있었고, 우리 마을 사람으로는 강규남의 가족 5명(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시영과 그의 처자, 양신하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가 좁고 은밀한 곳이라 모두들 안심했지만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차하면 숨을 만한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굴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굴 밖으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경 토벌대와 민보단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오자 우린 급히 숨었습니다. 그러나 토벌대가 "살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모두들 밖으로 나왔습니다. 굴 안의 인원을 파악한 토벌대는 붙잡은 사람을 통해 알아낸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난 숨죽이고 있었지요.

(포기한) 토벌대는 마을사람들을 끌고 나가자 마자 굴 입구에서 바로 학살했습니다. 강규남의 아들이나 송시영의 아들은 불과 서너살 난 아기들이었는데...(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예쁘고 잘난 아까운 아이들이었지요.) 경찰은 그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거꾸로 메쳐 죽여버렸습니다. 인간으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분명히 학살자들은 그 죄로 곱게 죽지 못했을 겁니다.

강규남의 아내는 두어살 난 딸을 업은 채 도망쳤습니다. 나처럼 인근에 숨지 않고 더 깊숙히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빠져나오지 못해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굴은 너무도 크고 복잡해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들의 시신은 후에 동굴 탐사팀에 의해 발굴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증언자 : 양태병 할아버지,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1리, 2001. 6. 22, 증언당시 74세)


▲ 토벌대는 이 또래의 아이들까지 참혹하게 학살했다.

동굴 속에는 어음리 주민 뿐 아니라 납읍리, 장전리, 상귀리 등 인근 주민들도 다수 있었다. 납읍리 사람으로는 현병구의 가족인 현용승(75) 현용승의 아내(75) 변용옥(여, 28, 현병구의 아내) 현병구의 아들(1) 일가족이 몰살됐다. 양기원(여, 67) 진승희(54) 김정현(53) 현원학(51) 현원학의 아내(50대) 현규칠(33) 현규칠의 아내(30대) 안인무(29), 그리고 상귀리 사람인 진관행(80대), 장전리에서 온 변정옥(여, 29)과 변정옥의 어린 자식 두 명(5살, 3살) 등이 함께 붙잡혀 희생됐다.

대부분 노약자들인 이들은 난리를 피해 숨었던 양민들이었다. 그러나 토벌대는 숨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산사람'(무장대)이라 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제주4.3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토벌대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제주 섬사람들은 모두가 죄인

제주4.3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2000년 6월 8일부터 2001년 5월 30일까지 신고된 희생자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신고된 희생자 가운데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해 죽은 사람은 모두 1만2719명이다. 이들 중 토벌대에 의해 죽은 사람은 86.1%(1만955명), 무장대에 의해 죽은 사람은 13.9%(1764명)로 나타났다.

아무 죄도 없는 섬사람들에게 돌아온 건 지난 반세기 동안 '빨갱이요, 폭도'라는 이름이었다. 그 후 해마다 4월이 되면 제주 섬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 됐다. 그것도 국가권력으로부터 누명을 뒤집어쓰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내는 죄인들이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아직도 산천을 떠돌고 있는데...이 땅에 다시는 이런 살육의 역사가 되풀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4.3의 진실은 꼭 밝혀져야 한다.   /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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