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10)

모산재 2012. 4. 2. 00:53

 

다음 글은 제주 4.3의 아픈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굴렁쇠 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140616을 퍼온 것입니다. 1~9회분은 '한국 근현대사 자료' 카테고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잃어버린 마을, 제주 화북 곤을마을 전경. 별도봉 산자락 바닷가에 70여 가호가 모여살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지척에 두고도 찾아갈 수 없었다. 이별오름 별도봉을 걸어다녔던 수많은 시간동안 먼발치서 내려다보면서 얼마나 가슴만 쓸어내렸던가. 제주 4.3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화산섬 검붉은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진 마을. 저 살육과 폐허의 현장 속으로 피울음만 남기고 58년 전의 시간에서 그대로 멈춘 제주 화북 곤을마을에서 느끼는 나의 감정은 텅빈 수레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대량살육작전이 제주섬을 휩쓸고 간 것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조상 대대로 오손도손 살던 마을들이 쑥대밭이 됐고, 이유도 없이 섬민중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야했다. 미군의 품에서 젖을 보채던 이승만 정권의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은 그렇게 제주섬을 '피의 목욕통'과 맞바꿔 놓았다. 사람이 살던 집은 불타버렸고, 그 집에 살던 사람은 삶으로부터 쫓겨났다. 마을마다 적게는 수백년, 많게는 수천년을 이어오던 섬 공동체는 앙상한 뼈대를 드러냈다.

그 4개월은 제주 4.3이 지속됐던 7년 7개월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와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이 기간에 중산간마을 37,000여 초가가 불에 타 사라졌다. 제주 4.3 희생자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작전(三盡作戰)'에 제주섬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난민정착사업에 의해 복구되지 못하고 영영 '잃어버린 마을'이 84곳에 이른다.(2001~2002년 조사결과)

제주섬은 온통 피빛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섬사람들의 아비규환, 국가권력의 총칼에 죽어가면서 흘렸던 붉은 피, 불타는 마을의 저 붉은 원한들로 화산섬 제주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가 되고 말았다.

 

 
▲ 가운뎃곤을에 남아 있는 울담. 사라져버린 마을을 58년동안 지키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 제주 곤을마을 양민학살 사례

 

곤을마을은 제주 4.3으로 초토화된 바닷가 마을이다. 바다를 끼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것은 이 마을이 유일하다. 그만큼 제주4.3의 역사에서 주목받는 곳이다. 강경진압작전은 무장대의 활동과 맞닿아 있는 중산간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사라진 마을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후덥지근한 장마날씨와 겹쳐 지독히 무거웠다.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언제 비를 뿌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소나기 세례를 맞는 것이 나을성 싶었다. 이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만 있다면.

화북1동 '비석거리'를 지나 곤을마을 옛터로 들어가는 길에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오두카니 서서 앞을 가로막았다. 2003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세운 표석이다. 마을의 역사와 제주4.3 당시 폐촌 내력,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을 기리고 있다. 글귀 하나가 가슴자락에 오래 버텼다. "초가집 굴묵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구나..."

 

 
▲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표석.

 

 

설촌 700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곤을마을. 별도봉 쪽으로 화북천이 유유히 흐르다 곤을마을 입구에서 나누어지는 두 개의 물줄기는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다. 물줄기를 중심으로 서쪽이 안곤을(22가호), 가운데가 가운뎃곤을(17가호), 동쪽이 밧곤을(밖곤을·동곤을·28가호)이 있었다. '곤을'이라는 지명은 '물이 항상 고여 있는 땅'을 뜻하며, 그만큼 풍요로운 마을이었음을 말해준다.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에는 '고노포(古老浦)'라 표기되어 있다.

이 마을주민들은 58년전 지도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60~70여 가호(家戶)가 밭농사와 바닷일을 생업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보리, 조, 콩, 팥, 메밀, 고구마를 주로 경작했다. 바다밭에서는 화북마을에서 유일하게 멸치를 후렸으며, 테우를 이용한 자리잡이, 갈치와 오징어를 낚으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 곤을마을 옛터. 

 

 

곤을마을에 피의 광풍이 불어 닥친 것은 초토화 작전이 한창 전개되던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간. 1949년 1월 4일(음력 1948년 12월 6일), 그날은 몹시도 추웠다. 바람은 사납게 불고, 곤을마을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오후 서너시쯤 2연대 군인 40여명이 곤을마을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돌아다녔다. 집안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나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들을 끌고 나오면서 초가에 불을 질렀다. 이어 젊은 사람들 10여명을 곤을마을 앞바다에 세워놓고 총살시키고, 나머지 어린아이와 부녀자, 남자 어른, 노인들을 줄로 묶어 인근 화북초등학교(당시 지서)로 끌고 갔다. 안곤을과 가운뎃곤을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버렸다.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일은 다음날(음력 12월 7일)에도 계속됐다. 군경토벌대들은 밧곤을(동곤을)을 모두 불태웠고, 마을에 있는 주민 10여명을 앞바다에 끌고 가 물에 세우고 총살했다. 또 화북초등학교에 수용됐던 일부 주민들을 데리고 인근 연대가 있던 바닷가 속칭 '모살불'에서 모두 처참하게 학살했다. 이 참극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바다에 둥둥 떠 있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주검들을 보면서 공포에 떨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다른 화북마을로 소개(疎開)됐다. 마을의 평화는 깨져버렸다. 조상 대대로 뼈를 묻던 마을은 시커먼 잿더미와 축담, 올랫길만 남기고 앙상한 몰골을 드러냈다.

 

 
 
▲ 올랫길. 58년전 이 길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채 군경토벌대에 끌려가 총살됐다.

 

 


무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

"전혀 죄 없는 사람들을 다 죽여놨지. 자기 이름도 못쓰는 사람들을 다 죽였어. 군인들이 와서 집에 있는 사람들 잡아놓고 물가에 세워 놓고 죽였주...죽인 날부터 불붙이기 시작헌거라. 석유병을 집안 기둥에 항상 걸어놨었어. 석유병 꺼내서 촐[꼴] 한 묶음이나 조짚, 보릿대에 불을 붙여 집을 태웠어. 돼지도 다 불타서 죽고, 소도 불타서 죽고, 초가집이니까 쉽게 불이 붙었주. 화북에서 제일 피해가 커...곤을은 따로 떨어진 곳이니까 불을 붙여 버렸지. 사람을 못살게 해버린 거지. 원원! 시뻘겋게 집 하나도 없어. 하늘이 시뻘겋게 됐었지. 사람도 죽고 집도 불붙고 그러니까 그곳에 사람이 없어져 버린거라." (안명호, 남, 증언 당시 67세)

 
▲ 천명 / 강요배 그림

"안곤을은 여자고 남자고 전멸하다시피 했어. 15명 이상 죽었어...죽이면서 불붙였지...17세부터 55세까지 보이면 죽여 버렸어. 지금처럼 취조하고 말이나 물어봐서 죽이지 않고 '이거다, 폭도새끼다' 하면서 죽였지. 왜 죽였는지는 잘 모르지. 살아남은 걸 보니까 젊은 사람은, 나하고 여촌 형님은 막 지키러 오니까 살아나고, 두 세사람 밖에 없었어...전쟁, 전쟁해도 그런 전쟁이 없어." (김모, 남, 증언 당시 72세)

"집에 가보니 시어머님이 아기 업고 울고 있었어. '어떻게 해서 웁니까?' 물었더니 '저 국군들이 와서 아들을 잡아가 죽이려는 것 같다'는 거야. 바다에 나가 보니 완생이하고 축색이는 물이 내려가면 내려가고 올라오면 올라오고 그랬어.(밀물썰물에 따라 주검이 밀려왔다 떠내려간 상황) 바닷물에 세워놔서 죽여버리니까 그런거라." (문계생, 여, 증언 당시 86세)

"군인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주. 그때 우리 형님은 귀와 뇌가 아픈 환자였는데, 단순히 젊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 10여명과 함께 마을 앞 바닷가에서 총살을 당했지. 형님은 귀가 멀어 군인들에게 무슨 말 한마디 못하고 원통하게 죽고 말았어. 아버지는 당시 화북초등학교에 하루 수감된 후 숱한 고문을 당한 후 곤을마을 주민들과 함께 화북 연대(烟臺) 밑에서 다음 날 총살당했어." (김용두, 남, 증언 당시 79세)

 

제주 4.3 당시 곤을마을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대략 30여 명이다. 고성환(17, 남) 고용생(24, 남) 김광백(25, 남) 김금순(19, 여) 김기만(40, 남) 김대현(19, 남) 김두규(27, 남) 김봉두(22, 남) 김순현(21, 여) 김자윤(50 ,남) 김쟁현(27, 남) 김정(21, 남) 김희봉(30, 남) 신경근(19, 여) 신창근(29, 남) 신호근(24, 남) 안응빈(25, 남) 안치경(22, 남) 안치수(54, 남) 안치용(52, 남) 안치흠(36, 남) 안홍근(22, 남) 양치명(22, 남) 이기봉(19, 여) 이기용(18, 남) 이기화(23, 남) 이덕오(50, 남) 이시성(남), 허흡(37, 남) 등.

 

왜 그랬을까. 중산간마을도 아닌 해안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곤을마을에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이어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증언을 재정리했다.

음력 12월 6일경 무장대들이 군인차량을 지나갈 수 없게 돌을 쌓았고, 토벌대와 교전을 벌였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들이 많이 죽게 되었다. 그 중 살아남은 군인이 무장대 한 명이 곤을마을 방면으로 도망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장대에 대한 보복으로 "여기가 폭도마을이다"라며 곤을마을을 덮쳐 닥치는 대로 주민을 학살했다. 게다가 이 마을이 지형상 화북에서 떨어져 있는데다가 무장대가 은거할 수 있는 조건마저 갖추었다는 이유에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불 타버린 집터에 남아 있는 굴묵(온돌방에 불을 피우는 아궁이)(왼쪽 위), 안곤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식수터, 안드렁물(왼쪽 아래), 곤을마을 사람들이 쓰던 항아리(오른쪽).

 

 

제주 4.3 민중학살에 무슨 이유를 붙였던가. 그렇지만 죄 없는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광기라 할 수 있다. 심문도 재판도 없이 국가가 휘두른 공권력에 의해 마을과 함께 사라져버린 사람들, 그들의 원혼을 우리 역사는 얼마나 달래주고 있는가.

하루아침에 마을을 잃고 이웃마을로 소개를 간 주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난리통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축복으로 여겨야 했다. 가족과 이웃의 죽음을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에 불과했다. 돌을 몇 개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얹어 움막집을 짓고 맹추위와 사나운 비바람을 막는 것이 절박하던 순간이었다. 짚이나 억새를 깔고 잠을 청하건만 잠들 수 없던 곤을마을 사람들. 그들의 비참한 삶은 60여년이 지나도록 다 털지 못했다.

 

 
▲ 바닷가로 난 안곤을 출입구.(위) '잃어버린 마을' 담벼락(성벽)에 자라고 있는 파란 담쟁이덩굴. 이 마을 사람들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죽음의 강을 건너야 헸다.(아래)

 

 


이 아픔 언제 끝날 것인가

 

마을안길은 잡초만 무성했다. 먼발치서 서성이던 앙상함은 수풀더미에 가려진 상태다. 17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운뎃곤을은 그날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불에 탄 집터, 마당을 에둘렀던 울담, 집안으로 들어가는 올랫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이 마을을 끼고 하천정비사업이 이뤄져 마을의 원형이 일부 훼손되어 과거와 현재가 안타깝게 공존하고 있었다. 58년 전 마을이 사라졌듯이 그 아픔의 현장도 알게 모르게 사라지고 있다.

서럽다. 4.3의 후예가 되어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지만 귓전을 때리는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60여년이 지나도록 곳곳에 묻어있는 살육의 흔적에 아픔은 여전하다. 안곤을로 건너갈 때부터 온몸이 젖기 시작했다. 바닷바람도 멈춘 듯하다. 잿빛하늘 아래지만 여름장마와 동행하는 날씨는 경망스러울 정도다. 아,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다.

 



▲ 잡초만 무성한 안곤을 집터(위), 그 집터를 지키는 울담(아래).

 

 

그 언젠가 이곳에서 해원상생굿이 열렸다. 2004년 4월로 기억한다. 그 때 울먹이던 칠머리당굿보존회 심방의 섧고 애달픈 곡소리. 아직도 앞바다를 떠나지 못한 것만 같다.

 

"오순도순 살던 마을 56년이 지난 지금 남은 건 임자어신[없는] 집터, 돌담 뿐. 우리 아방 죽영 바당더래 던져[우리 남편 죽여서 바다에 던져], '불쌍한 우리 아방 살려줍써, 살려줍써' 손으로 싹싹 빌어도 다 죽여불곡[죽여버리고]. 남자 영혼들을 다 죽여덩 바당더래 던졍[죽여버리고 바다에 던져] 좋은 신체 다 묻히곡[묻어버리고], 여자 영혼들은 총소리 팡팡 나가난[나니까] 애기 업고 도망간도망가고]. 요근[똑똑한] 애기들은 살젠[살려고] 이리 붙어 도망가민[가면] 총으로 쏘아불고[버리고], 창으로 찔러불고, 어멍덜은[아내들은] '우리 남편 살려줍써, 살려줍써' 하믄 총질허영[총질하여] 쏘아불곡. 억울하게 돌아가셩[가셔서] 구천에 떠도는 영감님들, 50호 정도 가구가 오순도순 모아졍[모아져서], 밥이 어성[없어] '밥을 줍써, 밥을 줍써', 옷이 어성 '옷을 줍써, 옷을 줍써'.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 목숨보다 중한 게 있습네까..."

 



▲ 4.3해원상생 거욱대(위), 쇠망치 테러를 당한 거욱대 표석(아래).

 

 

그날 상생굿이 끝나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저마다 돌 하나씩 나르며 거욱대를 쌓기 시작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지회가 이 일을 맡았다. 어른 키보다도 높이 올라간 거욱대의 돌담마다 곤을마을을 떠나지 못한 천추의 한이 모아졌다. 4.3의 원혼과 유족의 아픔이 씻어지려면 '잃어버린 마을' 옛터를 얼마를 더 지켜야 할까.

'4.3 해원상생 거욱대' 앞에서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는 이 땅에서 비극이 되풀이 되지 말기를 염원하며 해원과 상생의 뜻을 모아 새겨놓은 거욱대 표지석이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누가 쇠망치로 곤을마을의 아픔에 광기를 부렸을까. 단단하게 만든 이 표지석도 60여년 내내 제주섬 민중을 갈라놓았던 우익테러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산산이 조각난 거욱대 표지석 하나 만으로도 오늘 제주4.3이 치유되거나 낱낱이 규명되지 못하고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슬픈 증거이리라.

 

 
 
▲ 무덤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꿈이나 있는 것일까.(가운뎃곤을 바닷가)

 

 

4.3이 어찌 끝났다 할 수 있으랴. 제주 민중의 4월 정신이 역사적으로 올곧게 평가받지 못하고, 또한 제노사이드 대학살의 진실이 어물쩡 넘어가는 시대에 어찌 4.3이 보상 몇 푼 받고 종결된 것이라 할 수 있으랴. 식민시대를 거쳐 분단의 길목에서 '하나된 조국'을 염원했던 그날의 함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면 반세기가 넘는 동안 우리 민족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지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모진 시절을 기억하는 오늘, 나는 다시 보았다. 흙 한줌, 풀 한포기, 돌덩이 하나에도 제주4.3의 이름으로 도도히 흐르는 민중의 역사를. 그리고 믿는다. 제주 4.3이 고통스러운 역사로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이 땅의 자주화와 조국통일을 이루는 그날까지 눈 부릅뜨고 이 시대를 증거하게 될 것임을. /굴렁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