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9)

모산재 2012. 4. 2. 00:49

 

아래 글은 제주 4,3의 이픈 진실을 알리기 위해 굴렁쇠님의 글 http://blog.ohmynews.com/rufdml/136538을 퍼온 것입니다. '한국근현대사 자료' 카테고리에서 1회에서부터 8회까지 퍼온 글을 볼 수 있습니다.

 

 
▲ 조천 선흘마을 주민들이 은신했다가 집단총살 당했던 목시물굴.

 

여긴 내 집이 아니라네
내가 거처할 곳이 아니라네 잠시
살러온 것 뿐이라네
저기,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두 참 남짓
멀지 않은 곳이라네
굴에서의 삶은 입에 곡기가 없었다네
굴 속에서 끌려나온 나의 몸이 총탄을 실컷 먹었다네
그건 나의 집의 밥이 아니었다네
그 위에다 휘발유,
내 몸 위에 불이 얹어졌다네
그건 나의 집의 온돌이 아니었다네
그 위에 나의 시신 위에
살아남은 자들이 흙을 덧씌워줬다네
그건 나의 집의 이불이 아니었다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잔디 입혀 이장한 이 무덤이 아니라네
여긴 내 집이 아니라네
나의 집은, 저기
두 참 바로 못미처
내가 살던 바로 그 집
마저도
불에
타버렸지만


- 김경훈 시인의 '집 - 흘리 목시물굴에서'

*'두 참'은 '10리'를 뜻하는 제주말

 

 

59년 전 제주 섬사람들에게는 집이 없었다. 두 발 뻗고 하루해를 보낼 여유도 없었다. 대명천지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 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저 넉넉한 하늘이 없었다.

제주4.3 유적지를 오래도록 누비고 다녔던 지인의 추모시를 기억에서 꺼내 읽으며 '목시물굴'을 찾았다. 다시 찾은 4.3 현장, 그 피울음이 말라붙은 곶자왈 속으로 들어갈수록 속죄하는 마음조차 부끄러웠다. 쇠창살에 매달려 있는 열두송이 국화가 59년 전 고통스러운 역사를 말없이 잇고 있었다.


 
▲ 열두송이 국화가 고통스런 59년 전의 역사를 잇고 있다.

 


제주 조천 선흘마을 양민학살 사례


제주 조천에 있는 선흘마을은 다른 중산간마을과 같이 군경토벌대에 의해 4.3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다. 선흘마을도 1948년 11월 21일 불길에 휩싸였다. 군인들이 텅 빈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간 뒤 숨어있던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이 전해졌다. 해안마을에 연고가 있는 노약자들이 주로 순순히 응했고, 나머지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숲이나 굴로 정신없이 피신했다.

이때 해안마을로 내려간 소개민들의 목숨은 아무도 지켜주지 못했다. 소개한 지 이틀만인 11월 23일, 소개민 수용소에 있던 20대 젊은 여성 5명 가량이 함덕리 바닷가에서 참혹하게 총살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 가까이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내려가고 싶어도 해안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주로 '선흘곶'('곶'은 제주어로 숲이 우거진 곳을 말한다)으로 가서 숨어 지냈다. 수십만 평의 동백나무 숲인 선흘곶은 방향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우거졌고, 자연동굴이 많아 은신처로서 적당했다.

 

 
▲ 선흘 곳자왈 지대, 이 일대는 자연동굴이 많다.
 
▲ 반못굴(도틀굴)을 알리는 표지판에 한무더기 피어난 노오란 유채꽃.

 

선흘 주민들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11월 25일부터 연 사흘째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동굴이 잇따라 발각됨으로써 초토화 작전 초기에 몰살을 당했다. 11월 25일 '반못굴(도틀굴)'이 처음으로 발각됐다. 천연동굴인 '반못굴'은 입구가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으나 안쪽으로 갈수록 넓고 높으며, 여러 개의 지굴과 2층, 3층으로 연결이 되는 미로굴이다.

반못굴에는 젊은 청년들 중심으로 25명 정도 숨어 있었다. 그날 선흘곶 주위를 포위해 사방을 감시하던 군인들은 마침 굴 밖으로 나와있던 주민 한 명을 붙잡아 마을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대라고 윽박질렀다. 죽이겠다는 위협 앞에 그 굴의 위치는 알려졌고, 함덕 주둔 군인들은 곧바로 들이닥쳐 굴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군인들의 총격으로 굴 안에서 희생됐다. 혼비백산 한 청년들은 총을 쏘며 들어오는 군인들에게 모두 체포됐다. 밖으로 끌려나온 주민들의 일부는 굴 인근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다가 그대로 총살됐다. 공포,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를 아는 섬사람들에게 들씌워진 최후의 순간을 표현하면 그렇다.

그 날 희생된 사람들은 고석배, 고순봉, 고순진, 고태식, 고원석, 김계원, 김기옥, 김대규, 김덕수, 김용옥, 부제휴, 부좌룡, 안석방, 오태효, 조홍륜, 김기수, 김기후, 조유빈 등 18명이다.

 

 


▲ 쇠창살 사이로 수난의 역사가 흐르는 반못굴(도틀굴).
 
▲ 저 굴 속에 숨어있던 주민들의 목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즉결 총살하고 나머지 몇몇 사람들을 살린 채 주둔지인 함덕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11월 26일 군인들은 전날 반못굴에서 잡은 사람을 다그쳐 주민들이 가장 많이 은신해 있는 '목시물굴'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목시물굴은 입구가 두 개로 길이는 약 100m 정도 된다. 한쪽 입구는 한 사람이 누워서 들어갈 정도로 좁고, 한 쪽은 비교적 크다. 안에는 넓은 공간도 있으나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암석이 바닥을 이루어 은신하기에는 고통스러운 공간이다.


 
▲ 목시물굴 가는 길에 세워진 표지목.
 
▲ 목시물굴 입구, 59년 전 피울음이 들릴 것만 같다.

 

목시물굴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아기 업은 여자와 노인 등 노약자를 함덕국민학교로 끌고 갔고, 나머지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해 버렸다. 군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휘발유를 시신에 뿌려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살아남은 양윤희(梁允熙)씨는 열일곱 살 때 누나와 함께 목시물굴에 숨어있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반못굴에서 잡힌 사람이 취조를 받다가 우리가 숨어있는 목시물굴을 알려주는 바람에 발각됐습니다. 군인들이 낮 12시경 들이닥쳐 우린 굴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군인들은 횃불을 들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오후 5시경 모두 잡혀 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군인들은 13세 이하 아이와 부녀자, 노인 등을 따로 구분하더군요. 난 17세여서 따로 서게 하였습니다. 내가 살 운명인지 갑자기 등이 가려웠습니다. 그래서 등을 긁어달라며 어린 아이 쪽으로 간 사이에 청장년들이 끌려가 총살당했습니다. 저와 누나는 다른 노약자들과 함께 함덕국민학교에 있던 대대본부로 끌려가 수용됐습니다. 그런데 미군 군용천막에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매일 밤 몇십명씩 끌어다 형식적인 취조만 하고 다음날엔 총살을 했습니다. 난 키가 작은 편이어서 15살이라고 속였습니다. A, B, C로 분류했는데요. 정보과에 있는 이북 출신 군인에게 가족구명운동을 했던 국민학교 1년 선배와 같은 조사서에 기재된 덕에 전 C급으로 분류돼 석방됐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1949년 1월 24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군인들은 함덕해수욕장 서우봉에서 총을 쏘아 바다로 떨어뜨렸습니다."  양윤희, 당시 71세, 조천읍 함덕리, 2001. 10. 12 채록 증언, 제주4.3진상조사팀

 

이것으로 학살의 광풍은 끝나지 않았다. 군인들은 목시물굴에서 붙잡은 주민 중 한 명을 앞세워 또 다시 굴을 찾아나섰다. 목시물굴이 발각된 지 하룻만인 11월 27일, 이번엔 웃밤오름 부근의 '밴뱅디굴'을 찾아내고 이곳에 숨어있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반못굴(도틀굴, 11월 25일), 목시물굴(11월 26일), 밴뱅디굴(11월 27일)이 잇따라 발각되어 선흘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강경진압작전 초기에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어갔다.

다음은 목시물굴과 밴뱅디굴에 있었으면서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김형조(金亨祚) 씨의 생생한 증언이다. 억울한 사연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도피생활의 와중에서도 굴 속의 희생자 명단을 적어 항아리 속에 감췄던 김 할아버지다.

난 목시물굴에 숨어 있었는데 반못굴에 있던 사람들이 희생되자 이튿날 몇몇이 모여 시신을 수습키 위해 나섰습니다. 반못굴로 향하던 중 갑자기 박격포 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모두들 겁에 질려 다시 목시물굴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굴도 곧 드러날 것이라고 판단해 굴 밖으로 나와 더 위쪽을 향해 뛰었습니다. 웃밤오름 부근까지 올라가 밴뱅디굴에 숨었습니다만 다음날 밴뱅디굴도 발각됐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맞서 싸우자며 굴 안에 방호벽을 쌓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굴 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그곳을 열심히 팠더니 굴 밖으로 구멍이 뚫렸어요. 밖으로 나오자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결국 그 굴에서 다섯 명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희생됐습니다. 내가 숨어 있었던 목시물굴로 가니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광경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시신에 휘발유를 뿌려 태웠는데 서로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중 얼굴이 심하게 탄 두 명은 식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우린 까마귀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으려고 시신을 가매장하였습니다. 나중에 유족들이 왔을 때 찾을 수 있도록 나무를 반으로 쪼개 그곳에 이름을 써서 시신 옆에 세웠습니다. 그 다음 희생자 명단을 적은 노트를 두권 만들어 하나는 제가 갖고, 하나는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이 항아리에서 문서를 찾아내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말입니다.선흘리는 피해가 컸습니다. 선흘1구인 경우 당시 300가호였는데 제가 확인한 사람만 해도 157명이 희생됐습니다."  김형조, 당시 80세, 조천읍 선흘리, 2001. 9. 25 채록 증언, 제주4.3진상조사팀

이 날 목시물굴에서 총살된 희생자는 고경환, 고달옥, 고영백, 고일생, 고임형, 고태휴, 김기환, 김병규, 김삼준, 김성천, 김성홍, 임원준, 김정봉, 김태진, 김홍인, 김봉수, 부사인, 부원화, 부좌룡, 부희룡, 부춘하, 안도훈, 안두용, 안창성, 안창윤, 안태규, 안태인, 양중근, 윤구성, 윤한생, 정창호, 조영순, 조홍배, 한정선, 한재준, 한재준의 딸, 부서남, 고백선, 안창하 등 주민 40여명이다.

전 날 반못굴(도틀굴)에서 붙잡힌 사람을 고문해서 목시물굴을 안내받아 주민들을 학살한 군인들은 길을 안내한 사람조차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목시물굴에 은신했던 주민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을 '반못'까지 끌고 오면서 건장한 남자들에겐 목시물굴에서 먹던 식량을 지고 오라고 했고, 장정들이 식량을 지고 와서 GMC 차량에 싣자 그들을 반못 바로 옆 '궤우물' 인근에서 모두 총살해 버렸다. 고백선, 고달홍, 안창학, 고순규 등이 그때 희생됐다. 또 고태근은 식량을 무겁게 져서 자꾸 비틀거리니까 '새동네' 쪽으로 끌고가 그대로 총살해 버렸다. 그랬다. 무고한 제주민중들 앞에서는 이승만 군대나 경찰은 아무 거리낌없이 살인마로 둔갑하는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그후 군인들은 총살을 면한 주민들을 GMC 차량에 태우고 함덕 대대본부로 돌아갔다. 이들 중 일부는 고문에 못 이겨 마을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벤뱅디굴 등을 안내한 후 총살 당했고, 북촌리 속칭 '엉물'에서도 15여명이 집단으로 죽임을 당했다.

 
▲ 누가 매달아 놓았을까. 붉은 무명천에 쓰여진 "4.3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4.3 정신 계승"이라는 글이 눈에 어른거렸다.

 

 


붉은 섬 제주, 동백꽃 지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전개된 '초토화 작전'은 제주 4.3에서 가장 참혹한 대량학살이 이루어진 시기다. 중산간 마을을 그야말로 초토화시킨 이 강경진압작전은 송요찬 9연대장의 지휘아래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10월 17일, 송요찬 중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敵性)지역'으로 간주하여,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제주도의 지형상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지점'은 대부분이 중산간마을이다. 그들이 무장대 근거지라고 하는 산악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 초토화 작전은 제주 섬주민을 모두 빨갱이로 내몰아 죽이기 위한 피의 살육작전을 예고한 것이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친미정권은 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제주섬에 선포했다. 그것은 제주섬을 휩쓸고 있는 광란의 기름불에 휘발유를 끼얹은 격이었다. 납작 엎드려 숨죽여 있던 중산간 마을에 이어 섬 전역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이것은 중산간에 자리잡은 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도움과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추정아래 채택된 것이다. 토벌에 나선 군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을 소개시킬 때마다 민가를 차례로 불질러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더욱이 소개령이 채 전달되기도 전에 토벌대가 들이닥쳐 방화와 총살극을 벌이는 바람에 마을의 주민들은 오도가도 못한 채 중산간지역의 굴과 숲을 찾아 도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토벌을 피해 입산한 주민은 2만여명이 넘었다. 제주4.3에서 '입산자'는 곧 발각되는 대로 총살되는 '죽음을 기다리는 이름'일 뿐이었다. 이들 입산자와 해안마을로 소개되어 내려온 입산자 가족은 이른바 '빨갱이 가족=도피자 가족'이 되어 다시 죽음으로 내몰리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자기 가족 대신 죽는 대살(代殺)로 많은 섬주민들이 해안부락에서도 아무런 죄없이 죽어갔다. 실날 같은 목숨을 움켜쥐고 소개 당해 내려온 주민들은 또 다시 피난길에 올라 입산해야 하는 운명을 겪었다.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사람들의 목숨은 오래 연명되지 못했다.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의 산악지역 수색작전에 발각되어 결국에는 대부분 총살을 당했다. 피난 입산자의 성별과 나이만으로도 이들이 무장대원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군경토벌대의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초토화 작전은 상상할 수 없는 대량학살을 몰고 왔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온섬이 두려움과 공포로 오그라 붙었다. 중산간은 그야말로 생지옥,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이승이 어디고 저승이 어딘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산도, 오름도, 계곡도, 곶자왈도, 동굴도 소리 죽여 학살의 현장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참혹한 희생은 진압군의 '전과(戰果)'로 역사에 새겨졌다. 이것이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의 실체요, 야만적 증거이다. 그들은 제주섬에서 미쳐 있었다. 그때부터 불기 시작한 집단학살의 광풍은 이듬해(1949년) 2월까지 그칠 줄 몰랐다.


 
▲ 대지 위에 누워있는 동백꽃들. 동백꽃은 제주4.3민중의 넋을 상징한다.

 

1년 전, 이 곳 선흘 목시물굴에서는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땅(학살터)까지도 함께 치유하는 '상생의 굿판'이 열렸다. 해원상생굿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칠머리당굿보존회가 집전하는 위령굿, 풍물굿패 신나락이 연물놀이로 풀어내는 소리굿, 놀이패 한라산과 작곡가 겸 민중가수 최상돈씨가 한데 어우러져 풀어내는 몸굿이 여섯시간 넘게 이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비명에 간 이 땅의 주인을 가슴 안에 묻었던 그 땅도 말이 없다. 말을 잊고 있는 것일 뿐 잠들지 않은 영혼이 머무는 잠들지 않은 땅이다. 이 목시물굴 자락을 울린 해원상생굿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랴. 결국 죽은 자와 산 자를 잇고, 통곡의 땅과 통곡이 멈춘 땅을 이어 진정한 해원의 길을 찾아 나서면 그만인 것을.

숲이 우거진 목시물굴에 볕은 내리지 않고, 대신 싸늘한 냉기를 몰고 오는 4월의 바람이 사납다. 이곳에는 유난히 동백나무가 많다. 목시물굴 영령들의 붉은 피울음을 기억하려 했을까. 아니면 동백꽃이 지듯이 고귀하고 소중한 목숨이 저항할 새도 없이 하나 둘씩 숨져 갔던 그 날의 역사를 증거하려 했을까. 동백꽃으로 피었다가 우두둑 통째로 떨어지기를 반복했던 59년의 세월, 이 고통스러운 순환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제주도민의 한과 아픔이 가시고 무고하게 죽어간 영령들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는 날, 오욕의 역사가 걷히고 제주4.3 진상규명이 명징하게 이루어지는 날, 제주 중산간 들녘에 동백꽃은 다시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떨어지더라도 4월 봄날 잘게 부서지는 볕을 쬐며 상생의 몸짓으로 누워있으리라.

서러운 땅, 선흘 중산간 들녘에 날이 저문다. 4월 영령들과 잠시 헤어질 시간이다. /굴렁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