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지리산의 가을 (4) / 은분취, 산오이풀, 산일엽초, 가문비나무, 사스래나무, 까마귀

모산재 2009. 11. 2. 21:51

 

구불구불 숲을 벗어나자 마당처럼 환하게 이어지는 좁은 등성이, 그리고 아침햇살 따뜻이 받으며 사람들로 붐비는 장터목산장이 고향의 집처럼 푸근하게 느껴진다. 그 뒤로 완만히 오르는 제석봉 길은 또 얼마나 정다우냐. 

 

어제도 한신계곡 가내소폭포에서부터 혼잣길이었는데 오늘도 세석에서 이곳까지 혼잣길을 오지 않았는가. 지리산 등산로가 저잣거리처럼 붐비는 것이 싫었는데 이번은 어쩐 일인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하니 고적함조차 다 느끼는 것이다.

  

 

 

잎 모양과 몇 안 되는 포편의 수를 보고 얼핏 분취일까 했던 녀석은 아무래도 은분취일 것 같다. 꽃이 필 때 뿌리잎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서울 주변에 산다는 분취가 여기까지 나들이했을 리는 없잖은가.

 

꽃과는 무관하게 뿌리잎만 무성히 자라고 있는 아래 사진은 증거로 따로 담아 본 것이다.

 

 

 

 

쑥부쟁이꽃은 거의 시들어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렇게 바위 틈에 웅크리고 찬 바람을 피한 녀석들은 커다란 꽃을 달고 있기도 했다.

 

 

 

내리는 햇살을 따스히 받고 있는 산오이풀의 분홍 수술과 꽃밥이 예뻐서 자꾸만 들여다 본다. 이쁜 것 너무 밝힌다고 핀잔 들어도 어쩔 수 없어...

 

 

 

뜻밖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나타나 공중을 몇 번이나 선회하더니 고사목 위에 앉아서 까악~ 하고 길게 울음을 우는데 아주 입이 찢어지는 모양이 눈에도 선명하게 보인다. 늦가을과 겨울 들판을 까맣게 덮는  까마귀떼들 재수없다고 돌팔매질하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이즈음엔 귀해진 까마귀를 어쩌다 만나면 반가움이 앞선다.

 

나도 한번 까악~ 하고 소리질렀더니 요 녀석 깜짝 놀라 휘잉~ 날아가 버린다. 배짱하고는...

 

 

 

 

제석봉 능선 전망대에서 돌아본 지리산 전경. 왼쪽 끝에는 촛대봉, 오른쪽 끝으로 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두 봉우리 반야봉이 보인다. 반야봉 왼쪽으로 더 멀리에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는 노고단...

 

 

 

가까이 보이는 풍경을 클로즈업하고 보니 단풍이 제법이지 않은가...

 

 

 

 

능선의 풀밭, 푸른 하늘을 이고 시들어가는 산오이풀 꽃을 담아 보았다.

 



지고 있는 꽃이 대부분이었지만 은분취는 흔했고, 꽃이 지고 씨앗을 날려보내기 직전인 녀석의 몽타주를 잡아 보았다.

 

 

 

 

열 몇 번은 다녔던 길이라 하나하나가 익숙하고 정겨운 풍경들, 쓰러져가는 고사목이 있던 자리에는 돌탑을 조성해 놓았다.

  

 

 

햇살 쏟아드는 등산로 곁 암벽을 배경으로 때늦게 흰씀바귀가 꽃을 피우고 있다. 

 

 

 

이것도 지리바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언뜻 보기엔 세잎돌쩌귀일까 싶은데, 실물로 만나는 초오속은 언제나 어렵다.

 

 

 

통천문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서 만난 사스래나무는 수십 년(불덩이로 타오르던 6.25를 지켜보았을지도 몰라...) 지리산 비바람에 시달리며 예술이 되어 있다. 열매도 담아 본다.

 

 

 

 

비교적 싱싱해 보이는 과남풀 꽃을 만나 눈맞춤해 주었다. 연애하는 기분으로...

 

 

 

이것은 지리터리풀의 열매라고 생각해서 담아본 이미지이다.

 

 

 

통천문을 지난다.

 

 

 

바위벽에는 일엽초가 무리지어 자라는데 고산지대의 이 일엽초는 산일엽초로 본다.

 

 

 

줄줄이 꽃을 피운 모습을 보이는 은분취...

 

 

 

허리로 난 길로 오느라 보지 못한 오른쪽 바위 봉우리를 돌아보았다.

 

 

 

다시 전망이 훤한 바위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근경에서 원경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반야봉-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종주 능선길을 더듬어 본다.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꽃을 떨군 참바위취는 좁쌀만한 열매는 물론 가죽질의 잎마저 붉게 물들었다. 

 

 

 

이곳의 고사목은 대다수가 아마도 가문비나무일 것이다. 원래 제석봉과 천왕봉 주변은 울창한 침엽수림지역이었다고 한다.  6.25전쟁때 불타기도 했지만 이승만 정권때 불법제재소를 만들어 놓고 도벌하던 벌목꾼이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질러 버려 이곳이 고사목지대가 된 것이다.

 

 

 

 

가문비나무의 잎은 요렇게 생겼다.

 

 

 

뭘 자꾸 이렇게 돌아보게 되는지... 예쁜 사람 이렇게 돌아봤으면 내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앞에 보았던 사스래나무는 천상의 그림(이데아)이고 이 사스래나무는 지상의 현실(실재)이다. 이데아에겐 혼을 빼앗기지만 실재에겐 정이 오간다.

 

 

 

바위봉우리인 정상 아래에 도착해서도 또 돌아본다. 비웃지 마라. 십 수 번을 종주했던 능선의 봉우리들, 익숙해지고 정든 만큼 사랑하는 어찌할 수 없는 촌스런 나만의 사랑법이다.

 

 

 

드디어 지리산 정상에 섰다. 시베리아 바람이 와 있는 듯 폐부가 다 시원해지는 1915m 고지.

 

 

 

칠선계곡을 내려다보며 30리 산 아래 벽송사와 그 아래에 묻혀 있었던 원혼들을 생각해보았다. 불덩이로 일어난 조국 사랑이 거대한 무덤이 되어 버렸던 지리산의 비극이 찬 바람을 타고 가슴이 잔해 온다.

 

 

 

중봉 방향 풍경. 여러 해 전 폭우로 산사태가 나 패어나간 긴 골의 상처(왼쪽)는 많이 아문 듯 보인다. 저 상처는 쉽게 아물었는데 반 세기를 훌쩍 넘긴 이 땅의 비극은 치유되지 않은 채 봉합되고 쓰라린 가슴 부둥켜 안고 살아가는 사람 너무 많지 않은지...

 

 

 

아, 그리고 하나 잊었던 것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 민족의 성산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며 설치는 개발론자들... 산을 오르려는 자는 자신의 발로 땀을 댓가로 바치며 올라야 한다. 자연의 정령이 깃든 심산 꼭대기를 시장바닥으로 만들려는 심보는 무엇일까.

 

<한겨레, 09. 11.19 인용>

 

 

정상의 바위틈에도 둘로 갈래진 암술들을 내민 은분취 꽃이 피어 있어서 나를 감동시킨다. 잎은 하얗게 다 말라버렸는데...

 

 

 

어느덧 오전도 반 나절이 지나고 있어 발걸음을 재촉하기로 한다.

하산해서 점심을 먹고 예매해 둔 버스를 타야 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