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에 도착하자마자 해지기 전까지 남은 두어 시간을 일주 도로를 따라 편하게 대강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그러다 보니 처삼촌 벌초하듯 여기 힐끗 저기 비죽, 체계도 없이 돌아보게 되는데, 게다가 해질녁의 차가운 바람이 거세니 일행은 차에서 내리기도 싫어 차 안에서 눈길 한 번 던지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고인돌도 하마비도, 상서리 돌담길도 그렇게 지나쳤지만 그래도 서편제 촬영지만큼은 모두들 내려서 돌아본다.
▶ 촬영지 1
도청항에서 동쪽 고개를 넘어서면 나타나는 당리 마을, 그 속에 서편제 촬영지가 자리잡고 있다. 온통 울긋불긋한 페인트칠을 한 함석지붕이 가득한 마을에 돌담으로 울을 두르고 새로 이은 지붕이 다정스런 초가집...
집 마루에는 소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아버지 유봉과 혈연이 없는 두 남매의 영화 속 모습을 밀랍으로 만들어 놓았다.
영화 속 장면
※ 영화 서편제 떠올리기
1960년대에 접어들 무렵일까...
보성 소릿재에서 주막 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기는 동호(김규철), 그는 누나 송화와 아버지 유봉을 찾아 헤매는 길이다.
마을 대갓집에서 소리품을 팔던 유봉(김명곤)은 동호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양딸 송화(오정해)와 함께 새 삶을 꾸린다. 금산댁이 아이를 낳다 죽자 유봉은 동호와 송화를 데리고 소리품을 판다. 동호에게는 북을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던 중 동호가 생활고와 유봉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뛰쳐 나가 버린다. 유봉은 송화가 자신을 떠날까 봐 그리고 송화의 소리에 한을 심어주기 위해 그녀의 눈을 멀게 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스레 간호하는 유봉, 그러나 그는 죄책감으로 죽어가며 송화에게 그 일을 사죄한다.
몇 년 후, 유봉과 송화를 찾아 헤매던 동호는 누추한 주막에서 송화를 만난다. 송화에게 판소리를 청하는 동호, 송화는 아버지와 똑같은 북장단을 치는 그가 동호임을 알지만... 동호는 북을 잡고 눈먼 누이는 <심청가>를 부른다. 송화는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대목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대목까지를 밤새 부른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아버지 눈을 떠서 어서 나를 보옵소서."
밤새 소리로 만나 눈물범벅을 이룬 오누이는 말없이 헤어지고 송화는 다시 길을 떠난다.
대가집을 찾아 소리를 해주고 돈푼을 챙기거나 약장수 따라다니며 호객용 소리품을 팔며 입에 풀칠하는 유봉과 두 남매, 그들의 삶은 역마살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붙들린 삶, 정착이라고는 없는 길 위의 삶이다. 셋이 함께 진도아리랑의 신명 속에 걷던 길은 동호가 떠난 뒤 부녀만이 가야하는 어두운 색조의 길이 되고 마침내는 소리로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 송화만의 외롭고 처절한 길이 남는다.
재회한 송화와 동호가 밤새 소리를 함께 나눈 후 다시 말 없이 길을 떠나는 장면에서 관객들도 말없이 눈물만 쏟을 수밖에 없는 것은 길 위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소리'의 운명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 촬영지 2
이곳은 도락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솔숲이 둘러선 그림 같은 해안선을 바라보며 언덕을 걸어 오르며 찾는다.
이곳은 유봉과 두 남매가 길을 떠나며 들길 위에서 '진도아리랑'을 신명나게 부르고 춤을 추었던 곳으로 청산도 도청항에서 동쪽 고갯마루에 오르면 금방 나타난다.
영화 속 장면
※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춤을 추는 롱테이크 장면 영상
무려 5분40초 동안을 롱테이크(길게찍기)로 잡은 이 장면은 영화 <서편제>에서 가장 명장면으로 꼽히는 '진도아리랑' 장면이다. 본디 그렇게 찍을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장소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바꿨다고 임권택 감독은 설명한다.
저 멀리, 황톳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세 사람, 약장수와 다투고 갈라서 길을 떠난 유봉과 두 남매... 흰두루마기에 등짐을 멘 아버지 유봉(김명곤)와 흰저고리 검은 치마에 가방을 든 딸 송화(오정해)와 흰 바지에 검정 조끼를 입고 북을 멘 아들 동호(김규철). 돌담을 돌아나오며 유봉이 진도아리랑을 선창하자 딸이 화답하고 아들도 북채로 장단을 맞추며 어느 새 신명나는 춤사위가 벌어진다. 화면은 세 사람의 어깨춤으로 출렁인다. 유봉일가의 소리는 점점 흥을 더하며 가까이 다가와 화면을 꽉 채우고 빠져나간다.
그리고 텅 빈 황톳길에 때마침 나부끼는 먼지 바람...
그런데 바로 이 황톳길은 경운기가 다니기 불편하다는 주민들의 민원으로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가 섬을 찾는 관광객들의 요청으로 얼마 전에 이곳 촬영지 부근만 다시 황톳길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쉬운 점은 바로 위에서도 보였던 것처럼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서편제의 촬영지에 만들어진 것인데,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풍경이 마음에 불편스럽다.
진도아리랑 장면 촬영지에서 내려다본 당리 마을 풍경
페인트칠한 지붕들은 예전에는 모두 초가집이었던 것들이 새마을운동으로 함석 지붕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모습일 것이다. 저 가운데 유일하게 보이는 초가집이 바로 앞에서 본 서편제 촬영지이다.
멀리 오른쪽으로 보적산과 범바위가 보인다.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당리 촬영지의 모습을 도락리 바다와 도청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재현해 놓았다. 오른쪽 소나무 숲에 당집이 있는데, 그래서 마을 이름이 당리인 모양이다.
청산도에는 마을 입구마다 당산나무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천 년은 묵었을 법한 당산나무가 보여 동호와 송호가 걸터 앉아 소리를 하던 그 나무인가 하고 한5 동안 바라보기도 하였다.
소리와 가난이 지긋지긋해진 동호가 유봉에게 대든 뒤 붉은 황톳길을 따라 멀어져 갈 때 당산나무 곁에서 망연자실 그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송화...
그 인상적인 당산나무는 알고보니 이곳에 있지 않고 전라남도 영광 백수읍의 지산리 길가에 서 있다고 한다.
● 봄의 왈츠 촬영 세트장
세트장 앞의 밭에는 화사한 드라마의 분위기에 맞게 유채를 가득 심어 놓았는데, 아직은 파릇파릇 어린 풀로 꽃이 피려면 두어 달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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