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자료

제주 4.3의 슬픈 증언 (8)

모산재 2007. 4. 5. 14:10

 

이 글은 4.3의 진실을 널리 알리고 있는 굴렁쇠님의 블로그 <내 마음속의 굴렁쇠> http://blog.ohmynews.com/rufdml/130384에서 퍼온 것입니다. 65여 년 전 그날의 아픔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기를 바라며...

 

 

통곡마저 사치스러운 절망의 땅에서

 


▲ 아픔의 현장을 찾아가는 길에 세워진 안내판. 길목마다 수없이 세워져 있다.

제주 모슬포로 가는 길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싸늘한 기운이 마중 나와 있었다. 수없이 이 길을 걸어 다녔지만 다시 찾을 때마다 명치끝을 찍는 아픔은 여전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왔던 땅, 이재수 민란의 거점지, 제주민중의 아픈 속살처럼 태평양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몰골을 드러낸 곳. 아, 그리고 통곡마저 사치스러운 제주 4.3의 아픔이 한국전쟁까지 이어진 절망의 땅.

짙은 먹구름이 차라리 좋았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대정고을을 품에 안았다면 저 들판에 내가 홀로 버틸 수 있었을까. 그 옛날에는 찾기가 힘들었던 '섯알오름 학살터'와 '백조일손묘역'. 이젠 제법 안내판이 길을 인도한다. 길을 묻는 것이 부끄러웠던 지난 날, 유적지랍시고 찾아가는 것이 한없이 원망스럽고, 한없이 죄스러워 주소를 먼저 알고, 지적도 한 장 떼어 직접 찾아다녔다. 그 때 이 길에서 얼마나 헤매었던지 기억이 새롭다. 그 옛날 나를 닮은 사람들에게는 이 안내판이 죄의식을 덮어 줄 것인가. 착잡하지만 한숨을 쉴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을 따라 자동차를 몰았다.

먼저 '송악산 섯알오름 학살터'부터 들렸다. 모슬포 알뜨르 군비행장터에는 여전히 태평양전쟁의 상흔인 전투기 격납고가 아가리를 벌린 채 괴물처럼 포복자세로 웅크려 있다. 곳곳에 남아 있는 격납고는 모두 20개이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견고함 그대로다. 파괴된 격납고도 없다. 연합군의 공중폭격에도 끄떡없이 견디며 전투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격납고는 '가미카제'(新風)로 설명된다. 이른바 자폭용 전투기를 동원하여 최후의 발악을 준비했던 군사시설이다.


 

 
▲ 알뜨르 군 비행장터에 있는 전투기 격납고. 잔뜩 웅크린채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 섬찟하다.

 


56년이 지난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탄약고의 자리다. 패잔병 일본군이 떠나면서 폭파해 버린 탄약고는 그 형체를 알길이 없다. 잡초와 나무들만이 비운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이 예비검속자에 대한 양민학살 후 5년 9개월 동안 억울한 넋들이 방치된채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잠들지 못했던 슬픔의 구덩이다. 영혼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하다. 여기서 죽어간 영령들을 수습하여 모신 곳이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다.

섯알오름 학살터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백조일손묘역'을 찾아 갔다. 묘역의 뒤로는 제주 화산섬의 상징인 단산오름이 나즈막이 걸려 있다. 오른쪽 저 멀리로 산방산이 있다. 자연에서 나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원통하게 죽은 넋들이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잠들어 있다. 여기 올 때마다 늘 떠오르던 생각은 대지 위에 누운 영령들에게 이 낯익은 두 오름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영혼의 벗이자 위안'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믿지 않고는 이 황량한 무덤가를 오래 머무를 수 없다. 시퍼렇게 살아나 나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 벌초하다가 중단된 백조일손묘역.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 같다.

 


이번에 소개하는 '증언'은 '예비검속자에 대한 대량학살'에 관한 사례다. 제주 4.3을 다루면서 가슴속에서만 묻어둘 수 없는 생생한 역사적 슬픔이자 무고한 제주민중에 대한 대표적인 대량학살, 다시 말해 제주 4.3이 분단시대와 어떻게 맞닿았는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으로서 제주 4.3의 진실을 캐내는데 중요한 증거가 되는 사례에 해당한다.(제주도의 입장에서는 4.3의 이음줄로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양민학살사건이 될 것이다.)

 


죽음의 예비검속, 돌아오지 않는 슬픈 영혼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 각 지역 경찰서에서 파악하고 있던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 조상이 다른 일백 서른 두 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조상은 일백 서른 둘이요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명명된 섯알오름 학살터 희생자 묘역.


 

 

예비검속 희생자,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은 인민군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이 예비검속은 패망 직전 일본제국주의에 반발하는 조선민중을 처단하기 위해 만든 조치였다. 1945년 패망이 임박하자 일제는 '비상사태에 따른 제1호 조치'를 통해 반일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즉 소련군과 미 영군이 상륙하면 각각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요시찰 대상자를 예비검속 하고, 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워지면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기며, 만일 옮길 여유가 없으면 학살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 조치는 소련군이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급속히 괴멸시키던 상황에서 전국의 경찰서장에게 암호로 타전됐다.

이승만 정부도 그대로 써먹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전국에 걸쳐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군 당국의 총살 집행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인민군이 남하하여 8월 8일에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치하며 격전중인 때였다. 제주도의 경우, 인민군이 경남ㆍ부산 지역을 점령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 속에서 미리 제주도를 반공기지로 삼고자 예비검속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 다시 제주도에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4.3이 끝나갈 무렵 아픔을 치유해 가던 과정에 일어난 또 하나의 광기였다. 4.3 강경진압작전 때 검속되었다가 일차 석방되었던 사람, 경찰이나 서청 등의 우익단체에 한번 잡혀가서 그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 귀순자, 그리고 무고한 양민들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체포되어 참혹하게 죽어갔다.

제주도 경찰당국은 이들 검속자에 대한 범죄 경중 급별 심사를 비밀리에 사정하고 제주도 주둔 해병대 계엄사령부에 이관했다. 이들에 대한 등급 분류 지시는 1950년 7월 7일 제주도경찰국에서 각 경찰서에 내려졌다. 등급은 A, B, C, D로 분류됐데, D등급이 가장 중요한 자, C등급이 중요한 자, B등급이 경한 자, A등급이 애매한 자로 정했다. 판단 기준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D급과 C급은 곧 트럭을 타거나 배를 타고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죽음의 등급이었다.

검속 대상자들도 다양하다. 제주경찰국 접수 공문을 보면, 6월 말부터 8월 초에 이르기까지 공무원 교사에서 학생과 부녀자 등에 이르기까지 예비검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요시찰인 일제 검거에 대한 ○○○의 언동건', 濟警査 제6206호, 1950. 7. 1 ; '공무원 구속자 보고의 건', 西署査 제1880호, 1950. 7. 7)

제주지역에서는 1950년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서 여러 차례 대대적인 집단 총살이 이루어졌다. 제주 경찰국 관할 제주, 서귀, 대정, 그리고 성산의 4개 경찰서에서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1,000여명의 양민이 학살됐다. 당시 경찰서에 수감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명령 및 집행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와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경찰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비검속자 사살은 극도로 비밀리에 수행됐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총살된 현장은 우연히 주민들에 의해 발각됐지만, 나머지 제주 및 서귀포경찰서에 검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희생 일시 및 장소 등 당시 상황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철저히 기밀로 처리됐다. 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행방불명된 희생자의 시신 암매장 장소는 물론 사망일조차도 몰라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증언 자료들에 의하면, 서귀포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7월 29일 150명 정도가 희생됐다. 독립운동가 출신 문형순이 서장으로 있는 성산포경찰서에서는 군의 지시를 거부하여 성산포 예비검속자 D급 및 C급 80명 중 6명만이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가 서귀포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희생됐다.

제주읍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총살 집행은 두 번에 걸쳐 실시됐다. 처음 집행은 1950년 8월 4일 이루어졌다. 제주경찰서 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제주항으로 끌고 가서 배에 태우고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수장시켰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 파견 헌병대에서 경비 근무를 했던 장시용의 증언에 의하면, 밤 9시경에 50명씩 태운 차 10대가 부두에 도착하여 알몸 차림의 500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집행은 1950년 8월 1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실시되었다. 주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을 트럭에 싣고 제주비행장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암매장했다.


 

 
▲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학살터 안내판.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학살 사례

예비검속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제주도내의 유일한 학살터가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44명 중 252명을 새벽 2시경과 5시경 2차에 걸쳐 밤중에 총살하고,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 당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모슬포 주둔군 해병대 제3대대 대대장 김윤근 소령의 지휘에 의해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이들 희생자는 모슬포경찰서 관할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과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1950년 8월 20일 새벽 5시에 총살됐다. 이승만 정부가 수도를 부산으로 옮긴 뒤 이틀만의 일이다. 음력으로는 7월 7일, 견우가 직녀가 만나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는 칠월칠석에 제주 섬사람들은 영영 이 세상과 작별하고 이별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같은 날 새벽 2시에 총살됐다. 총살 장소는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였다. 같은 장소이지만 모슬포에서 끌려간 희생자들과 한림에서 간 사람들이 희생된 위치는 약간 달랐다. 학살이 있고 나서 얼마동안은 모슬포의 개들마저 전부 미쳐 헤매 다녔다고 한다. 8월 한여름에 252구의 시신이 썩어가는데 그럴 수밖에...

8월 20일 아침 7시경 상모리에 사는 청년 이경익, 정용삼은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가던 도중 가까운 곳에서 소를 먹이는 유계돌 노인의 귀띔으로 학살현장을 목격했다. 정용삼에게는 유족들에게 비보를 전하도록 하여 아침 8시경 약 300명 유족이 현장에 집결하고 이경익씨 주도하에 27구의 시신을 간신히 수습했다.

그런데 아침 9시경 공포탄을 쏘며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출동하여 시신 발굴 작업이 저지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이미 수습한 시신들을 깊은 웅덩이에 다시 내려놓도록 위협했고,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며 주민 접근을 통제하는 한편 이곳을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어버렸다. 출입금지는 이후 7년 동안 계속됐다.

1956년 3월 30일 한림지역 유족들은 총살 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 한림지역 유족들은 수습하여 온 시신 61구를 한림면 금악리 2754번지 속칭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했다.

1956년 5월 18일,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 수감 희생자 유가족의 끈질긴 청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 149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중 132위를 상모리 586-1번지 묘지를 매입하여 안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상이 다른 일백 서른 두 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조상은 일백 서른 둘이요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명명했다. 오랫동안 학살터에 방치한 결과 누가 누군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된 슬픈 공동운명체'였던 것이다.


 

 
▲ 박정희 군사정권이 증거인멸을 위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들.

 


그후 4년 뒤인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유족들은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책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긍정적인 답변으로 호전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 쿠데타'로 무산되고 말았다. 유가족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받았다. '거창'과 마찬가지로 양민학살의 증거 인멸을 위해 1961년 6월 15일 서귀포경찰서 강규하 서장의 지휘아래 백조일손 위령비는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공동묘역 해체명령'에 의해 안장되어 있던 23기의 묘가 강제로 이장 당하는 등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이 가운데 2002년 4월 5일 청명을 맞아 7위가 백조일손 묘역으로 재이장 되어 현재 116기가 영면해 있다. 그리고 현재 세워진 새 위령비는 1993년 8월 24일 제주도 4.3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세운 것이다.)

한순간 삶의 기반을 잃고, 평생을 '연좌제' 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던 섬사람들, 선친의 억울한 누명을 풀고 학살의 주범에게 연유를 따져 묻고픈 유족들의 한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전후 '예비검속에 의한 양민집단학살'은 육군본부정보국 CIC와 내무부 치안국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됐다. 2000년 1월 24일 김종필씨(면담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중위)와 백조일손 유족회 대표가 만나 한국전 당시 양민학살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예비검속자 처형'이 당시 육국본부정보국 제4과 CIC의 김창룡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김종필씨를 면담한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도영 박사이다.

그리고 2001년 3월 28일, 한국전쟁 당시 섯알오름 양민학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 대대장 김윤근(당시 소령)이 지휘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이도영 박사가 김윤근으로부터 직접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예비검속자에 대한 집단양민학살의 최종 책임은 이승만이며, 국가권력이다. 이 사건은 이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요, 제노사이드(genocide) 범죄에 해당한다.


 

 
▲ 예비검속자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송악산 섯알오름 양민학살터. 이곳은 일제 당시 탄약고였다.


 

 

형님(양기하)은 1950년 8월 20일 제주도에서 예비검속에 의해 학살되어 백조일손묘역 어느 위치에 영면해 있습니다.

형님은 1950년 7월 29일(음 6월 15일)은 '음력 보름 물질'이라고 하여 제주도에서는 해산물을 잡으러 바다에 많이 가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아버지 댁 초가지붕의 집줄을 곱게 정리한 후 형수님에게는 외양간에 매어둔 소를 들판에 가서 먹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딸 둘을 데리고 평소에 잘 갔던 '전세비덕'이라는 바닷가로 일을 나갔습니다.

형수가 소를 몰고 집 앞을 나섰는데 이웃에 살고 있는 인척분과 마주쳤습니다. 인척은 "형님은 어디 갔습니까?...동네 분들이 부락 향사에 전부 모이고 있는데 형님에게만 연락하지 않았다고 할는지... 형님께 연락이랑 하십시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형수는 소를 몰고 나왔던 발길을 돌려 외양간에 다시 소를 메어 두고 형님을 찾아 늘 갔던 바닷가에 갔습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바닷가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인척의 말을 전했습니다.

"오늘의 간조시간은 오후 2시쯤 지나야 바다물이 빠져나가서 해산물을 잡게 될 것 같다. 지금 시간이 12시도 안됐으니 시간적 여유도 있고, 너희(딸)들은 바구니를 가지고 앉아 기다리고 있거라. 동네 분들이 모여있는 향사에 갔다가 2시간 내에 돌아오마."

그렇게 하여 형님이 향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모여있던 분들은 다시 무릉지서로 전부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진하여 무릉지서를 찾아간 것입니다. 형님은 곧바로 갈중이(갈옷) 작업복 바람에 구금되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 날 저녁 형수는 갈아입을 베옷과 저녁밥을 가지고 찾아가 면회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다시 갈아입을 옷과 아침밥을 가지고 찾아가 보니, 지서 앞에 트럭을 세워놓고 큰 통나무들을 싣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전부 실은 후에는 나무 위에 사람들을 태우고 모슬포 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2시간 안에 돌아오겠다고 하며 스스로 찾아갔던 것이 22일 만에 대살 되어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 양신하(백조일손 유족), 2002. 6. 25. 증언

 


 

 
▲ 슬픈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백조일손묘역. 이곳에는 116구의 시신이 묻혀 있다.


 

 

섯알오름으로 가려면 지서 앞을 지나야 하거든. 그래서 전에 모슬포지서에 근무하던 사람도 태우고, 한림·명월 유족 스무 명 가량 아침 일찍 출발했지. 지서 앞에서 순경했던 사람은 지서에 가서 우리가 올 때까지 놀고 있으라고 해놓고, 우린 섯알오름으로 갔지.

처음에 갈 때는 59구로 알았지. 그런데 파다 보니 3구가 남는 거라. 그것도 그냥 수습해다 묻었지. 참 아무 죄없는 사람 다 죽었지. 칠석날 며칠 전일 거야. 소까이[소개] 갔다가 모두 다 올라와 성도 쌓고, 민보단 하며 보초도 서는디 한림에서 도리우찌(모자) 쓰고 육지말 하는 토벌대 사람 하나가 나타난거라. 민보단 사무실에 오더니 며칠 조사하고 보내준다고 하면서 이름을 부르더라고. 이름 부른 사람 중에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잡아가고, 나머지 사람은 집을 가리키라고 해서 우리 중동에만 8명을 잡아다 놓더니 "여기 귀순자는 없느냐?" 또 물었어.오용승이라고 하는 스물댓 난 놈이 미련하게 가만히 있었으면 안 죽었을 건디,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해버린 거라. 그래서 같이 가 죽었지.

누군가가 밀서(密書)하면, 그 밀서한 놈도 경찰에서 "너같은 놈은 또 배반한다"고 죽여버렸다고 하대. 다 억울한 사람들이야. 오용승이도 겁이나 산에 도망갔다가 귀순한 아이고. 나머지는 경찰에 한번 안 잡혀가 본 사람들이거든. 한림지서에 2~3일 갇혔다가 칠석날 밤 2시쯤에 모슬포에 끌고 가 죽여버렸다고 나중에 소문이 났어.

우리가 시신을 파는데 보니 몇 사람이 와서 구경하면서 묻더라고. "어디 사람들이 와서 파 가느냐?"고. 우린 한림에서 왔다고 하니까, 자기들은 "옆에 백 몇 사람이 죽은 곳 사람들이라고" 그랬어. 우린 옆 웅덩이에 백 몇 사람 죽었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건 몰라.  - 김달천(증언 당시 89세, 한림읍 명월리) 증언, 제주4.3연구소, '4.3장정'에서 재정리

 


 

 
▲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들의 꿈'이 피빛 공포로 다가올지라도...

참담하다. 이승만 정권이 전국에 걸쳐 북한의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자행한 예비검속. 제주 4.3으로 쓰러진 화산섬 제주가 또다시 피빛 세상 속에 잠긴 것이다. 4.3의 유혈 광풍이 모자랐단 말인가.

제주역사가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의 존엄과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일이 너무나 고난의 행군이라는 사실 그 하나. 그러나 나는 안다. 제주민중이 목에 가시가 걸려 침조차 삼키지 못하던 58년의 역사 속에도 '4.3 정신'을 지켜왔고, 낮은 단계이지만 진실의 계단을 향해 의연하게 한계단 한계단 오르고 있음을. 이제 서서히 드러난 것만으로도 한세월 절망과 두려움에 시달렸던 가위눌림을 당당하게 걷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제주 4.3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다. 4.3 속에서, 한국전쟁 속에서 수없이 주검이 된 영혼들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역사다. 죽은 자들이 아우성치는 역사가 아니라 산 자들이 풀어야 할 생생한 우리의 역사다. 이 땅에 묻혀진 역사를 다시 찾아내고, 기억해 내고, 그 진실찾기를 계속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제주 4.3에서 통일로 완전한 세상을 만들 때까지 '우리들의 꿈'이 피빛 공포로 다가올지라도 시대의 정의를 어찌 두려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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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제주 섯알오름사건을 포함하는 제주예비검속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이 조사는 제주 4.3과는 별개로 진행될 예정이다. 2006년 11월 2일 제주도청 대강당에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제주예비검속사건 관련단체·기관 관계자, 언론인 등을 초청하여 한국전쟁 당시 군 당국에 의해 저질러진 예비검속 사건에 대한 제주지역 설명회를 개최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한 조사와 진실규명,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국가적 보상으로 숨죽인 56년의 한이 말끔이 씻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굴렁쇠